정부는 생명 살리는 일 매진, 교회는 방역 지침 자발적 동참
19세기 후 공중 보건 개념 적극 수용
국민 건강 위협 병리 요소 제거 나서
부산물, 사회적 낙인 발생할 수 있어
현재 한국교회, 주범 낙인 찍힌 상태
19세기 이후 현대 정부들은 ‘공중 보건’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정부는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병리적 요소들을 제거하려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유로 특정 그룹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부산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 권력은 그런 낙인을 정치적 동기로 조장, 방치하는 경우도 있어 왔다.
최근에 한국교회가 전염병 확산의 주범이라는 낙인이 인터넷 상에서 확산되고 있다. 교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타고 중앙과 지방 정부도 주일 예배 자제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일부 교회에 대해서는 집회 금지를 명령하였다.
이런 정부의 강경 조치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정부의 행정 명령을 한국교회에 대한 억압과 위협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 글은 다윗 시대에 발생한 전염병에 대한 성경 본문(사무엘하 24장)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COVID-19)에 맞서는 정부와 교회의 올바른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삼하 24장, 가장 오래된 전염병 기록
인구조사 형벌, ‘여호와의 손’ 선택해
고대 사회에서 역병 치사율은 ‘100%’
사무엘하 24장에 기록된 전염병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염병에 대한 기록 중 하나다. 고대 근동 역사를 통틀어도 전염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아브라함 시대를 선행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마리 문서(Mari Letters)에 기록된 전염병으로, 이것은 대략 아브라함 시대와 일치한다. 사무엘하 24장에 기록된 전염병의 발생 시기는 다윗 왕의 치세(주전 1000-960년) 이상으로 특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무엘하 24장은 사무엘서의 부기(附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다윗의 치세 중 발생했던 사건 중 사무엘서의 결론적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성경 저자가 선별하여 그곳에 위치시킨 본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병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정확한 연대보다, 역병이 다윗이 왕으로 다스리던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사무엘서 저자가 그 역병 사건을 책 전체의 결론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대강은 이렇다. 다윗의 인구 조사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기근, 전쟁, 역병, 세 가지를 제안한다. 그 중 다윗은 마지막 역병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야드 야도나이)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야드 아담)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4절)”.
인용된 구절에 따르면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 원했다. ‘하나님의 손’은 그 자체로 질병을 지칭하는 고대인들의 어법이다. 다윗은 이것을 ‘사람의 손’과 대비시키며, 전쟁이나 기근 대신 역병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전쟁이나 기근으로 인한 죽음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손’에 기인한 것이다. 전쟁과 기근의 상황에서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칼이나 빈핍이 아니며, 미워하는 손이며 인색한 손이다. 즉 전쟁과 기근의 경우,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역병의 경우 사람이 손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역병의 치사율은 100%에 가까웠다. 고대 사회에서 알려진 전염병은 크게 부종형 전염병과 폐렴형 전염병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치명율이 50-90%, 후자의 경우 100%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전염병의 파괴력은 35만명을 죽인 중세 흑사병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다윗, 사람 손보다 하나님 구원 기대
역병 멈춘 이유, 여호와의 ‘뉘우치심’
다윗 회개 이전,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처럼 역병은 어떤 사람도 막아설 수 없는 것으로, ‘신의 손’으로 불릴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이 ‘여호와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은 다윗의 믿음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하다. 죽이시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막을 수 없는 것을 여호와는 막으실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증오를 거두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그들이 인색한 손을 펼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다윗은 진노 중이라도 긍휼하심을 잃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합 3:2 참조)을 기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전염병이 이스라엘 전국에서 7만명을 죽인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갑자기 멈추게 되는데, 그 이유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역병이 멈춘 이유는 여호와의 ‘뉘우치심’(니함)이다. 죽음의 재앙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여호와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천사’(마슈히트)에게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윗이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에 근거한 조치였다. 다윗의 회개는 17절에 가서야 언급된다. 다윗의 회개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먼저임을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죽음의 역병 앞에서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한 정치 지도자 다윗
사무엘서 전체에서 이 에피소드가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하는 다윗의 통치가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음을 말한다.
다윗은 국가 재난 상황에서 그 백성을 구하는데 무능력했다. 역병의 상황에서 7만명의 사상자가 생겼지만, 다윗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윗은 죽어가는 백성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역병이 멈추게 한 하나님의 구원이 거저 주어지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제단의 피흘림을 대가로 한 것임을 보여준다.
위에 인용한 16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죽음의 천사에게 손을 거두라고 명령하는 대목에서 사족처럼 죽음의 사자가 서 있던 곳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 곁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타작마당 구입 에피소드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그 장소가 성전의 제단이 놓일 곳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긍휼은 제단의 희생을 담보로 베풀어진 것이다.
이 두 가지 메시지를 종합하면, 사무엘하 24장의 역병 사건은 인간 다윗의 통치가 가진 한계를 부각시키며 미래의 다윗의 후손—영원한 제물이 되실 메시아—을 고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무엘서에 그려진 다윗 왕의 통치는, 진정한 왕의 통치를 바라보는 예표적 성격을 가진다.
전염병과 권력
역병 앞에서 무력했던 다윗 이야기는 구속사적 의미뿐 아니라, 인류 보편적 메시지도 포함한다. 특히 전염병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전염병은 언제나 권력의 무력함을 폭로해 왔다. 이것은 고대 왕정이나 현대의 민주정에 모두 적용된다. 공중 보건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현대 국가에서도 강제적 행정권이 전염병 방역에 가지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전염병 역사가 보여준다.
보다 효과적인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협력이다. 따라서 전염병 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the sanctity of human life)에 집중하는 것이다.
귀한 인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들은 치료제와 백신의 개발에 힘쓰고, 일반인들은 전염이 확신하지 않도록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해야 할 것이다. 의사들은 감염된 사람들을 확인하고 그들을 적절히 격리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 모든 일에 정부는 행정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정부가 과학자들, 일반 시민, 그리고 의사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는 것처럼, 권력자들의 명령으로 전염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인간의 생명을 앞에 두고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다. 전염병 정국에 마스크를 쌓아두고 비싸게 파는 것,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전염병 정국을 이용하려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자연히 정부와 여당이 비난받기 매우 쉬운 입장에 선다. 왜냐하면 민주 정부에서 권력의 자리는 언제나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비난받는 정부의 입장에서 억울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에 대해 정치적 맞대응의 필요성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염병 정국에서 정부와 여당은 비난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옳은 일 즉 생명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막상 야당이 악화된 민심을 틈타 정부와 여당의 방역 대책을 비난하면 정권 자체에 대해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그에 반응하게 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비난이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국민의 일부, 특히 여론에 낙인 찍힌 단체들을 희생양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죽음의 재앙 앞에서 본능적으로 그 재앙에 대한 설명을 구하고, 책임을 추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흑사병 때에는 유대인들이 병을 옮기는 자로 비난받았고, 미국 사회에서는 한때 아이티 사람들이 결핵을 옮기는 자들로 비난받았다. 심지어 그들의 특정 문화가 혹은 특정 행동 방식이 전염병의 원인인 것처럼, 전염병 방역을 빌미로 그들의 문화를 없애려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잘못된 여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교회 모임에 대한 행정 조치는 전염병 방제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해 온 교회들의 노력을 백안시하는 것이다.
전염병을 이기는 것이 전문인, 일반인, 종교인 할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행정권의 남발은 마치 시민적 연대의 보조자에 불과한 정부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인 양 착각한 결과 발생하는 것이다.
전염병 사태 중에서 정부는 낙관적 태도를 삼가며, 병으로 돌아가신 분들, 투병 중에 있는 분들, 나아가 최전선에서 고생하는 모든 의료인들 앞에서 철저히 겸손해져야 한다. 사회의 모든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이 가능해 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 과정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옳은 일, 즉 생명 살리는 일에 묵묵히 매진해야 한다. 그러면 이 일이 다 끝난 후 국민들은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정부의 노력을 평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과 한국교회
사무엘하 24장의 역병의 원인은 하나님의 분노와 연관되어 있다. 1절 전반부가 이를 명확히 말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이 다윗의 인구조사 때문은 아니다. 이것은 1절 후반부에 바로 설명된다.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의 인구 조사는 진노한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켜 하게 한 것이 인구 조사이다. 7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역병의 재앙은 다윗의 죄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화가 나신 이유에 대해,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죄를 짓게 하고 그 잘못을 묻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여호와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과, 다윗과 같은 통치자는 그런 세상에서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는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유토피아처럼 이상적인 세상을 물려받는 법은 없다.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즉 타락과 죄로 부서지고 찢어진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세상에는 특별히 통치자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좋은 왕은 하나님의 분노 아래에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왕이다. 사무엘하 24장은 인간 왕 다윗이 그 일에 실패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희망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제단, 하나님의 통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교회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교회도 인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본받아 실천해야 한다.
시민으로서 각자 여건과 재능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과학자라면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힘쓰겠지만, 평범한 일반 교인들은 불필요한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집에 머무는 것도 생명의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방법일 수 있다.
앞서 정부의 행정 만능주의를 비판했지만, 예배 중지를 고민하는 교회는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의 방역 안내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예루살렘을 보고 불쌍히 여기사 죽음의 사자의 손을 거두게 한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구해야 할 것이다.
김구원 박사(전 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