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교회 7] 이유 묻기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신뢰하자
2020년 1월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상황. 고난이라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형편.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다 끝난 것 같은데 안 끝난 것 같은, 어느 시점을 다 끝났다고 말하기 어려운, 다 끝나도 또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이란 늘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다. 고난이 찾아왔다가 끝나도, 결국 또 다시 찾아온다. 그래서일까? 성경 역시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거짓 교사들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고난과 고통이라는 주제를 결코 피해가지 않는다.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에게도 고난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칼빈도 온갖 질병을 가졌으며, 주기철 목사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고난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점에서 고난은 보편적이다.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주시는지 어떤 것은 설명 가능하지만, 어떤 것은 설명이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다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의로운 이들이 당하는 고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찾아오는 엄청난 고통, 예배드리러 가다가 당하는 사고 등은 설명이 어렵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비롯해 전쟁과 지진, 쓰나미 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인류의 고통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이다. 조롱당하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피 흘리셨으며, 죽으셨다.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셨다(히 4:15).
그 고난은 우리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 분이 왜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재판을 당하셔야 했는지, 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셔야만 했는지, 죄가 전혀 없으신 분께서 왜 악과 고통의 세상에 기꺼이 들어오셔서 고초를 당하셔야만 했는지를 우리는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해하기 어려운, 너무나 애매한 고난을 받고 있지만, 이럴 때 주님의 고난은 더더욱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만큼이나 애매한 것이 있을까?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게 있을까?
이때 왜 그런지 어려운 문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쉬운 선택이다.
2020년에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어쩌면 현 세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피부로 와닿는 고난주간이 될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주님의 고난에 비하겠느냐만은.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특강 예배모범』(흑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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