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고질적인 문제다. 예를 들어 성경 읽을 때,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복'을 이해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개념이 된다. 이렇게 인식된 복 개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미신적으로 채워지는 기복을 주는 종교로 둔갑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은 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풍요와 형통은 복의 결과로 이해된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천국, 사랑, 믿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동일한 맹위를 떨친다.
이런 차원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부분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이해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용어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 은사주의 자들, 혹은 신사도 운동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영적인 것’을 주로 신비적 체험으로만 관련 지어 이해한다. 환상을 보거나, 영음(靈音)을 듣거나, 입신을 하는 등의 신비적 체험들에 한정하여 영적인 것이라 한다. 때문에 그들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라 한다. 반대로 주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들은 영적이지 못한 사람, 심하게는 육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육적이라고 가르치고 있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리는 철학이 이야기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에는 철학적 인식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영적인 것이란 물질적인 것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플라톤주의 인식의 기초를 이룬다. 이런 인식론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도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과 관련된 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나 신학에 충실한 지적 영역을 기초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육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체험이 없어서 지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무시한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자.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구별은 타락한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로 본다. 성경이 가르치는 ‘육적인 것’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부패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유다서 1:19을 보면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한 구절이 대표적이다. 우리 주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고 했을 때, 여기서 영과 육은 물리적인 것과 그에 반대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성경)에 합한 것과 하나님의 뜻(성경)에 위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 다음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33)고 첨언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성경)에 부합한 삶이란 인간 의지의 결단이나 지적인 인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성경)을 성령님의 은총 없이 의지의 결단만으로 행(行)하면, 그 행위는 육적인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외식(헬/히포크리테스), 즉 ‘연극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성경)과 관계없이 영적인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육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은 환상이나 꿈이나 예언하는 사람들을 육적인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은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셔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을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셨다. 이 말씀은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영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또 종교적인 것은 영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은 육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영적인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과 진리로 하면(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다 영적인 것이 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질적인 것이 다 사라지고 영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는 세상이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므로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한 연금술사로 이해된다. 죄로 타락한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도록 신자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예배’다.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는 삶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며 모든 것을 영적인 것(하나님의 영광)으로 화하게 하는 연금술사로 부름받은 것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