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별기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가정의 달이라는 5월. 한국교회의 신앙 명문가를 말하라면 필자는 단연코 황해도 장연의 김성섬 씨 가정을 말하고 싶다.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비밀히 성경이 보급되고 교회가 생겨났을 때,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이가 김성섬(金聖贍)과 부인 안성은(安聖恩)이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들은 서상륜을 도와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성겸은 소래교회의 설립에 동참한 창립 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소재한 곳이 대구면(大救面)으로, ‘큰 구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런 좋은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대구면에서 출발한 교회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었으니 대구면은 이름에 함당한 ‘큰 구원’의 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약 70가구가 살고 있던 소래에서 김성섬 씨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자 그의 자녀들은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 자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 한국교회의 명문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김성섬 집사는 4남 4녀, 곧 8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은 어릴 때부터 교회당에 출입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로 일생을 살며 이 나라의 독립과 해방, 건국과 애국운동를 통해 우리 사회 여러 영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 아들 김윤방
김성섬의 첫째 아들은 김윤방(金允邦)인데, 부유한 지주였으나 겸손히 주님을 섬긴 믿음의 사람이자 한학자였다. 그는 소래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것이 소래소학교였다.
김윤방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개화 인사였다. 그는 김몽은(金蒙恩)과 혼인하여 세 딸을 두었다.
첫딸이 김함라(金函羅)였다. 정신여학교 출신인 김함라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는데 1908년 남궁혁(1881-1950. 8 납북) 박사와 혼인했다. 남궁혁 박사는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수득한 평양신학교 교수였다.
둘째 딸이 김미염(金美艶)인데, 세브란스 의전 6회 졸업생으로 선한 의사였고, 방합신(方合信)과 혼인하였다.
셋째 딸이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였다.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에서 고모·언니들과 같이 수학하며 신학문을 익혔고, 1905년 모친 사망 후 1906년 서울로 이주하여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였고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이를 국내에 전파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추대됐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김마리아는 독신으로 살아 직계 후손이 없으나,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배학복을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그는 후에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과 혼인했다.
둘째 아들 김윤오
김성섬의 둘째 이들이 김윤오(金允伍, 1853-?)였다. 김용순(金容淳)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백범·도산과 막역한 사이였다. 서울로 이주하여 서우학회라는 애국계몽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로 활동했다.
서우학회를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던 인물로서 애국지사였다. 그는 김경애와 혼인했는데, 외동딸이 세라였다. 세라는 구약의 사라(Sarah)라는 뜻인데, 1906년 3월 22일 세브란스 의전 3회 졸업생인 의사 고명우(高明宇, 1883-1950?)와 혼인했다.
그들은 서울 남대문 밖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언더우드의 주례로 결혼했다. 고명우의 아버지 고학윤(부인 안리아)은 소래교회 출신으로 부산지방 초기 전도자였고, 북장로교 선교사 브라운 베어드 어빈의 어학선생 겸 조수였다.
고명우 박사의 딸이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한 고황경 박사였다. 세라의 남편 고명우는 후일 미국에서 유학하고 의학박사가 되고,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그리고 남대문교회 장로로 봉사했다.
셋째 아들 김윤렬
김성섬의 셋째 아들은 김윤렬(金允烈)이었으나, 알려진 정보가 없어 소개하지 못해 유감이다.
넷째 아들 김필순
넷째 아들은 김필순(金弼淳, 1878-1919)이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인 그는 동료 6명과 함께 한국 최초로 대한제국의 의사면허를 받았던 탁월한 의사였다. 의전 재학 중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서 구국운동을 펼쳤고, 세브란스병원에 재직하면서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은밀한 회합 장소로 제공했다.
그는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의형제를 맺고 1907년에 신민회를 조직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극 동참했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전병현(全秉鉉)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기지의 개척에 힘썼다.
그 뒤 내몽골 치치하얼(齊齊哈爾)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을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또 무관학교 설립에 힘썼던 애국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조수가 준 독약이 든 우유를 먹고 순국했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필순의 아들 김덕봉(金德奉)도 의사가 되어 간도 용정 제창병원에서 근무하였고, 셋째 김덕린은 김염(金鹽, 1910-1983)이라는 예명으로 1930년대 중국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배우였다. ‘상해의 영화 황제’라는 호칭을 얻었다고 한다.
첫 딸 김구례
다섯 번째가 김구례(金求禮)였는데, 김성섬의 첫 딸이었다. 그 역시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한 엘리트 여성이었고, 후에 서병호(徐丙浩, 1885-1972)와 혼인했다.
우리나라 첫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사람인 서경조 목사의 아들인 그는 초대 선교사 H. G. 언더우드(원두우)의 아들 H. H. 언더우드(원한경)과 함께 한국에서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살았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 후에는 임정 산하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했고, 1927년에는 동서인 김규식 등과 함께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남화학원을 설립했다.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1947년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고, YMCA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YMCA 전시비상대책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경신학교 재단 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정년퇴직하였다. 그의 아들이 해군제독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현 장군이고, 손자가 조선족교회를 섬기는 사회운동가 서경석 목사이다.
둘째 딸 김순애
여섯 번째이자 둘째 딸이 김순애(金淳愛, 1889-1976)인데, 그도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고 부산으로 와 규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때 벌써 민족운동에 가담하여 중국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는데, 1915년 9월에는 남경(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서 수학하던 중 1919년 1월 김규식(金奎植, 1881-1950)과 혼인하여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김규식은 김순애의 오빠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였고, 또 같은 송천(소래) 출신이자 서울 새문안교회 동료 교인이었다. 상해로 이주한 김순애는 남편과 함께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1885-1972) 김철(金澈) 조소앙(趙素昻) 조동호(趙東祜)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고 이사(理事)로 활동하였다.
미국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한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민족혁명당 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이들의 셋째 딸이 김우애(金尤愛, 1925-2001)인데, 미국 예일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가 이 대학교 교수가 된 첫 한국인이다.
셋째 딸 김필례
일곱 번째이자 셋째 딸이 김필례(金弼禮, 1891-1983)인데, 그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여자학원 중등부와 고등부에서 수학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 조지아주 액네스 스칼여자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정신여자중학교 교사와 교감으로 봉직했다. 후에 김활란 유각경(兪珏卿) 등과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하고 총무가 되어 농촌운동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광주시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 정신여자중학교 교장, 정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남편이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의사 최영욱 박사인데, 광주에서 개업했다. 해방 후에는 전남도지사를 지냈다. 불행하게도 6.25 때 공산군에게 피살되었다.
김성섬은 어떻게 이런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되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삶이 중요한데, 단 한 가지 이유, 곧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기독교를 매개로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신앙 교육을 주시한 결과였을 것이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 결과, 세월이 지난 후 이 나라 도처에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상규(백석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