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칼럼]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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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회의 대분열 부른 14세기 아비뇽 유수와 대립 교황

아비뇽 유수, ‘교황권 몰락’ 상징하는 사건
중세 교회, 이후 끝내 옛 권위 되찾지 못해
당시 많은 사람들, 교회 개혁 필요성 인식

▲로마교회의 교황청(프랑스 아비뇽, 감옥 형태의 건물). ⓒ리포르만다
▲로마교회의 교황청(프랑스 아비뇽, 감옥 형태의 건물). ⓒ리포르만다

1. 중세 교회의 구습, 변화하는 세상

구약 시대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왕조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바벨론 사방으로 끌러가 포로생활을 했다. 하나님을 마음대로 예배하지 못하는 긴 고난의 기간을 보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는 로마교회 교황청이 1309년부터 1376년까지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렀던 73년 동안 세속 권력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시기를 일컫는다.

교권(敎勸)과 제권(帝勸)의 갈등 시기, 교회가 프랑스 왕권에 굴복한 것을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포로 시기에 빗대는 표현이다. 이 시기 일곱 명의 교황들은 이족의 땅에 머물며 국왕의 괴뢰(傀儡) 역할을 했다.

아비뇽 유수(幽囚)는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 전쟁(1095-1291) 때 각 족속 언어 중심으로 국가주의(Nationalism)가 발흥하고, 유럽의 단일 결속력이 해이해지고, 교황청의 권위가 하락하고 있을 때 시작됐다.

교회는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고풍스런 탐욕, 권력, 정치적 내분에 휩싸여 스스로 세속 권력의 포로가 되는 길을 자처했다.

십자군의 여파로 상업과 무역 활동이 활발해지자 새롭게 등장한 중산 계급은 새로운 사회 체제를 요구했다. 작은 도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황과 봉건 영주의 보호보다, 더 넓은 상업 활동과 재산권을 보장해 줄 중앙집권적 국가가 필요했다.

각국의 왕들은 영토 분쟁을 벌여 중앙의 힘을 키워나갔다. 아랍 세계와 교역을 하고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는 유럽인을 하나로 결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를 목격한 시민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국가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통치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국왕의 권력은 교회의 승인 여부에 제약을 받지 않으며, 국가의 재산은 오로지 국왕의 처분 아래 있다고 선언했다. 법률가들을 동원하여 봉건적 교회 중심의 법률 대신 로마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것은 로마 교회의 기존 교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필립 4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제도를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형태로 개선했다. 즉위 초기 이웃나라들 사이의 분쟁을 정리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프랑스 세속 왕권이 강화되자, 교황권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교황권은 필립 4세에 의해 결정타를 맞았다. 양측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직접적인 원인은 권력과 ‘돈’이었다.

2. 교황 제국의 꿈: 우남 상탐

‘교황 제국’을 꿈꾸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o Ⅷ, 1294-1303)가 로마에서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그 무렵 제국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신임 교황의 즉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빈곤과 청렴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프랜시스 수도회 수도사들과 교황좌를 노리던 이탈리아의 세도 가문 콜로나가(家)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봉건적 착취에 의해 억압당하던 하층 계급 사람들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들을 무시하고 프랑스의 필립 4세에 대항하여 교황 제국(Respublica Christiana)의 이상을 담은 두 개의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들은 모두 중세 로마 교회의 이상 곧 교권과 제국주의를 대변했다. 변화하는 현실에 역행하는 발상의 극치였다.

사회가 국가주의의 대로로 행진하고 있는 마당에, 교회는 고풍스런 통치 이념과 이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첫 번째 교서는 각국의 왕들이 교회에 과세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 ‘클러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 1296)’이다. 교회, 성직자, 교회기관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선물을 강요하는 세속 군주나 세속 기관장들을 파문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독일에 머물던 황제 에드워드 1세는 이 교서에 분노했다. 이와 관련해, 교황은 스코틀랜드를 교황령이라 선언하고 에드워드가 그곳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

이 교서는 프랑스 왕 필립 4세를 자극해, 프랑스의 로마 지원금을 삭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필립 4세는 국내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지시켰다. 필립 4세의 이 법안은 실질적으로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프랑스의 화폐 반출을 막았고, 교황청은 큰 타격을 입었다.

교황은 1300년 필립 4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국왕은 1302년 귀족과 도시의 대표자들을 노트르담 대교회당에 집결시켜, 왕이 국민 대표에게 협력을 구하는 자문 기관 형태의 ‘국민의회’를 개최했다. 국왕을 향한 귀족과 시민의 지지를 확고히 했다.

두 번째 교서는 ‘우남 상탐(Unam Sanctam: One Holy(거룩한 하나의 교회), 1302)’이다. 세속 권력이 영적인 권력에 예속된다는 내용이다.

“하나의 검이 또 다른 검 아래 있어야 하듯,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에 예속되어야 한다. 지상의 권력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영적 권력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만약 지존적 존재의 영적 권력이 오류를 범하면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 칙서는 교황 절대권을 담고 있다. 제국주의적 이상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회는 영적인 검과 세속적 검을 모두 가지고 있고, 또 교회는 세속 군주를 심판할 수 있지만 세속 군주는 교회를 지배할 수 없고, 군주나 귀족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니파시오 8세는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라는 이상을 행동으로 실현하려 했다. 서방 교회의 호전성은 이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교황권이 행사되는 영역을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라는 이상이 실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그 이상에 역행하여 다른 길로 나가고 있었다. 교회의 제국주의적 이상은 십자군 시대에 태동한 국가주의에 밀리고 있었다. 교황권의 쇠퇴가 예견되었고, 드디어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를 맞이했다.

프랑스 국왕의 고문이던 법학자 기욤 드 노가레의 계략에 따라 1303년 프랑스 병사들은 1303년 9월 7일 이탈리아 보니파시오 교황의 정적인 코론나 가문과 협력하여, 로마 남동 지역에 있는 아나그니 별궁을 습격했다.

프랑스 국왕 필립은 로마에 대항하는 정책을 승인받으려고 프랑스 의회를 소집했다. 교황은 1303년 9월 8일 필립 왕에 대한 파문령을 선포하려 했다. 교황이 여러 국왕들과 귀족들을 파문시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나니 사건 당시 프랑스군에 납치당하는 보니파시오 교황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아나니 사건 당시 프랑스군에 납치당하는 보니파시오 교황의 모습을 그린 그림.

교황이 아나니 성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인들은 그곳을 습격하여,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보니페이스 8세를 생포, 납치했다. 86세 고령의 교황은 난폭하게 구타당했다. 시아라로에게 뺨을 맞고 심한 욕설을 들었다.

교황은 순식간에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구타를 당한 뒤 당나귀 등에 거꾸로 앉혀 온 동네로 끌려 다니며 배회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폭도들에게 약탈당했다. 이 사건을 아나니(Anagni) 폭행 사건이라고 한다.

교황 제국의 지존자 보니파시오 8세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프랑스인들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반감 때문에 이틀 만에 풀려났지만, 뺨을 맞고 구타당했으며, 시내로 끌려 다니는 등의 모욕과 충격에 대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한 달 뒤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보니파시오 8세의 비극은 중세 교회의 몰락과 전제군주식 교회 권력과 교황 제국의 종말을 예고했다. 교황 제국에 대한 꿈은 ‘우남 상탐’이 발표된 시대를 고비로 점차 약화되었다.

단테는 중세 기독교 세계를 가장 열렬하게 지지했고, 교황권을 통한 유럽의 통일을 갈망했다. 보편적인 최고 권력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황들을 비난했다.

가난한 대중의 눈에 비친 교회는 봉건적 착취의 상징이었고, 교황은 그 착취 계급의 우두머리였으며, 교황청은 권모술수의 본거지였다.

교황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국왕 필립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으면서 교황 베네딕트 11세가 후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필립 4세는 1305년 자기가 마음에 드는 프랑스인을 새 교황으로 선출되게 했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 베르트랑이 클레멘스 5세(1260-1314)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제국의 절대적 영향력을 대변하듯이, 새 교황 즉위식은 ‘베드로의 교구’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열렸다.

국왕은 교황을 압박하여 1309년 위험한 로마 교황청보다 안전한 아비뇽의 주교관에 거주하라고 했다. 교황은 필립 4세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1309년에 거주했다.

교황청이 아나그니 사건 처리를 목적으로 비엔 공의회 개최 준비를 하던 사이, 이탈리아 반도는 현 독일 지역 신성로마제국의 헨리 7세의 침략을 받았다(1310~1313).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계속 체류했다. 당시 아비뇽은 교황의 봉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지만, 프랑스 왕국의 영토나 다름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에게서 제관을 수여받는 나라이다. 클레멘스는 헨리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취임을 지지했다. 헨리가 나폴리의 왕 로베르토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자, 그는 비엔 공의회와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로베르토 편에 섰다. 신성로마제국에 적대적인 노선을 취했다.

교황은 1313년 헨리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헨리가 죽은 직후 황제 자리가 비자, 클레멘스는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로베르토를 이탈리아의 황제 대리로 임명했다. 교황의 괴뢰 역할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감옥 같은 건물이었다. 성벽 높이 50미터, 두께 4미터였다. 이 건물은 프랑스의 왕권이 교황권을 완벽하게 장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아비뇽 유수의 원인 중 하나인 ‘카노사의 굴욕’을 그린 그림.
▲아비뇽 유수의 원인 중 하나인 ‘카노사의 굴욕’을 그린 그림.

아비뇽 유수 동안의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 필립 4세의 꼭두각시였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교황이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집무했다. 교황청은 73년 동안 프랑스 왕국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괴뢰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발표한 ‘클레리키스’, 곧 정부에 대한 성직자들의 특별세 납부를 금한 교서와 교황 수장권을 담은 ‘우남 상탐’을 무효로 만들었다.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 선출됐다. 프랑스 출신 성직자들이 교회의 요직을 차지했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됐고,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클레멘스 5세는 친프랑스파 추기경들의 음모로 교황에 선출돼, 그의 재위 기간 중(1305-1314) 한 번도 로마를 방문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그의 로마 복귀를 주장했지만, 필립은 교황을 자기의 수하에 두려고 여러 가지 핑계로 프랑스에 잡아 두었다. 클레멘트 5세는 모두 24명의 추기경들을 지명했고,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교회를 앞세운 클레멘스 5세의 가장 치욕스런 악행은 ‘템플러 기사단의 체포와 재판’이었다. 교회의 기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창과 칼을 들고 적과 싸우려 일생을 바친 독신자들이었다.

교회는 교회를 지키려고 일생을 헌신하는 자들에게 ‘이교자’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처단했다. 기사단 재산을 노린 프랑스 왕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성전(聖戰) 기사단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곳곳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필립 4세는 성전 기사단에게서 빼앗은 막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법률가들을 측근으로 두고 고등법원을 강화하고, 재정감찰 기관(chambres des comptes)을 두고 국왕의 자문 기관(palais de justice) 등을 두는 등 행정 기구를 체계화했다.

이런 정책으로 그는 단순히 ‘신의 대리자’라는 권력을 움켜쥐었던 교황과 차별하여, 법률적 정의를 실현하는 왕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프랑스 왕권 강화책 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73년 동안,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말미암아 가장 크게 손상을 입은 것은 교회 생활이었다. 프랑스 국왕의 하수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부정부패의 요람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이 백년 전쟁과 겹쳐, 프랑스에 대적한 다른 국가들은 교황청을 외국 세력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곧바로 교황청에 대한 적대감으로 연결되었다.

교황청이 관여한 전쟁과 음모에 많은 자금이 필요하자 교황 존 22세와 그 계승자들은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갖가지 추잡한 수단들을 도입했다. 성직 매매, 성직 중임, 궐석 성직제, 족벌주의가 흔했다. 교회의 목회 기능은 상실되었고, 성직들은 기나긴 공백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1377년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귀환함과 동시에 종식됐다. 시엔나의 캐더린이 교황청 귀환 운동을 펼쳐 민심을 움직였다. 캐더린은 그레고리 11세의 스승이며, 그에게 친절과 양선의 미덕을 가르쳤다. 교황청을 로마로 귀환하게 하는 데 교황만큼이나 큰 역할을 했다.

▲존 위클리프. ⓒ위키피디아

▲존 위클리프. ⓒ위키피디아

3. 교회 권력의 몰락, 교회 개혁 요청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 이후 중세 교회는 옛 권위를 되찾지 못했다. 교황청이 ‘베드로의 목회지’ 로마로 복귀했지만, 바벨론 포로 시대의 후유증은 지속되었다. 교회의 대립, 교권 투쟁,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1378년 이탈리아 인 우르반 6세가 새 교황에 선출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이에 대해 무효 선언을 하고, 프랑스 출신인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했다. 교회는 40년 동안 분열과 심각한 갈등을 맞았다. 교회는 대분열을 겪었다.

그레고리 11세는 다음 해인 1378년 사망하고, 교황 우르반 6세가 로마에서 선출됐다. 프랑스파 추기경들의 텃세는 여전했다. 신임 교황과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 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콘클라베의 우르반 6세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장소를 폰디로 옮긴 후, 제네바 태생 추기경 로베르를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두 명의 교황이 등장했다.

클레멘스 7세는 무력을 동원하여 우르반 6세의 축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비뇽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공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권, 탐욕, 제국주의 발상, 기득권 등은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가져왔다.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의 존 위클리프(1330-1384)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운동의 ‘새벽별’이다.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을 향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신앙과 행위의 최고 권위가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했다.

추락한 교회의 권위를 성경에서 되찾는 노력을 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는 교황이라도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교황에 대한 공세(貢稅)를 반대했고, 로마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을 비판했다.

교회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모든 정죄하고 금서로 공포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날 때쯤, 많은 사람들의 교회 개혁(리포르만다)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최덕성, <종교개혁전야>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 제5장 ‘한 목자 아래 한 양떼’ 참고.

▲최덕성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덕성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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