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청교도에게서 답을 찾다 (12)
필자의 은사 중에 한분인 윌리엄 바커 교수가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연구한 제목이 브래드포드의 경건이다. 브래드포드의 저서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강력하게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사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대한 경건의 모델이자,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브래드포드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점과 유익한 저술들 통해서 훗날 청교도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만약 더 활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순교했다.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인문학의 기초를 다진 브래드포드는 154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 해서 곧 다음 해에 마틴 부써를 만났는데 가장 가까이서 아끼고 따르는 측근이 되었다. 신학수업 기간에 브래드포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으로 이름이 높았고, 동료들은 그의 자기 희생을 보면서 “거룩한 브래드포드” (holy Bradford)라고 극찬했다. 크랜머의 초청을 받아서 1549년에서 1551년 사망할 때까지 케임브리지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청교도의 산실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브래드포드는 마지막 날까지도 부써의 가르침을 영국교회가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훗날 수많은 인재들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탁월한 신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나와서 수많은 설교자로 활동했다.
브래드포드는 랭커셔와 체셔 지방을 담당하는 순회설교자로서, 때로는 예리하게 죄를 지적하고 훈계하였으며, 달콤하고도 부드럽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했고, 간절하게 이단과 오류를 반박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심으로 경건한 삶을 호소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취임 직후, 1553년에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체포되거나 화형을 당했고 군중들은 폭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브래드포드는 이들을 진정시켰다. 브래드포드 역시 런던 타워에 갇혔는데, 옥중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서 극심한 불안과 고통을 당하는 중에서도 방대한 분량의 목회적 서신들과 경건한 묵상집을 집필했다. 이들 문서들에는 그의 종교개혁의 열정이 가득 담겨있다.
옥중에서 브래드포드는 사십 여명에 이르는 분리주의자들을 만났는데, 도박도 반대하지 않고 게임을 즐기던 종교개혁자들을 비판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소위 자유의지주의자들 (free will men)이었는데, 엄격한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브래드포드는 이런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교황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악하고 치명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구원의 원인과 효과를 근본적으로 혼돈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브래드포드는 피상적인 생각을 탈피하라고 주문하면서 세 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고』, 『선택에 대한 개략적 요약』, 『선택의 옹호』 등이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강조하는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여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로마 가톨릭의 가장 치명적인 맹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브래들리의 예정에 대한 확신은 마틴 부써의 영향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른 내용에서도 부써의 교리적인 측면들을 따르고 있는데, “주 안에서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반증하는 것이다.
1555년 6월 30일, 이미 공포되었던 헨리 8세의 『6가지 조항들』을 다시 강요하는 메리 여왕의 왕명을 거부한 죄목으로 크랜머, 라티머, 리들리 등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형제들이여, 선한 위로를 간직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밤에 주님과 함께 즐거운 만찬을 가질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시대에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사역자들은 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개혁신학을 소상히 파악한 인재들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는 리챠드 십스(Richard Sibbes)가 학장을 맡아서 온건한 청교도로 영향을 끼쳤고, 토마스 굳윈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중요한 신학자로 활약했다. 이들은 모두 다 교구 목양사역에 빼어난 설교자들로서 영적으로 충만한 열성을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려는 열심이 충만했었다. 상당수는 자신들의 교회를 칼빈의 제네바 교회처럼 장로교회 체제로 성숙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또 다른 청교도들은 기존의 성공회와는 달리 새로운 회중을 모아서 자유롭게 목회를 하고자 했다. 또한 상당수 목회자들은 기존의 교구제도 하에서 비록 전통적인 교회를 담당하더라도, 더 신실하게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신학의 저작물들이 가정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도덕적 개혁과 경건의 부흥과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각자 신학자로서 사역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학문적인 탐구와 정립을 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는 동떨어진 지성의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와 사회의 개혁이 신학적인 정립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신학의 적용들이야말로 모든 신학 작업의 중심에 놓아야할 사항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초기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개혁신학의 새로운 형태를 출범시켰다. 경건의 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는 권징을 실행하면서도 개인과 사회 공동체가 깊이 관련성을 맺고서 함께 노력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