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교회 집회 금지 조치의 역사적 의미
기독교 박해, 역사적으로 집회 제한에서 시작
콘스탄틴 황제 기독교 공인, 집회의 자유 허용
북한 공산주의자들 첫 번째 조치도 집회 방해
1. 문제점 제기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7월 8일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모임과 행사, 식사 제공 등을 금지하고, 출입 명부 관리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7월 10일 오후 6시부터 교회 수련회, 구역예배, 기도회, 성가 연습, 성경공부 등 각종 대면 소모임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심지어는 정규예배에서 찬송가는 작게 해야 하고, 통성기도는 금지해야 하는 등 소소한 세칙까지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시 300만 원 이하의 벌금과 교회 운영을 일시 중단시킬 수 있다고 위협했다.
여기에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시설에 대하여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지했다고 한다.
수도권에 이어 광주, 전남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자 이를 예방하려는 조치로 볼 수 있지만, 기독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한 제한 조치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교계 지도자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교회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를 제한하고 이를 규제하려는 것은 종교의 자유 혹은 선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독교회는 그동안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협조하고 방역 수칙을 준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마치 코로나19 감염병의 진원지인 것처럼 간주하고 교회 집회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회 집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게 한다.
셋째, 불교나 천주교 등 타종교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고 유독 기독교회에만 이런 제한 조치를 강제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감염자의 교회 출입으로 문제를 야기한 경우는 전체 6만여 교회 중 30여곳의 교회로 0.053%, 교회 관련 확진자는 전체 성도 수의 0.0057%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는 매우 부당하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이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 집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제한 혹은 금지 조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역사에 기대 지적해 두고자 한다.
2. 국가 권력의 예배의 자유 제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기독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worshiping community)’라고 불리는데, 예배는 교회의 생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고투해 왔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예배의 자유는 곧 신앙의 자유였고, 예배 금지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기원 후 64년 6월 로마의 화제 사건을 계기로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최초의 조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금지였다. 기독교인들의 공개 집회를 불법화한 것이다.
그 다음 조치가 교회 지도자들의 색출이었다. 근거 없는 소문을 빌미로 기독교를 해로운 미신으로 간주했던 로마 사회는 기독교를 혐오집단으로 규정했다.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단하다는 이유였다(행 16:21). 다시 말하면 로마인들이 받아들일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습(unlawful custom)을 전한다는 이유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풍속으로 볼 때는 도널드 크리빌의 말처럼 ‘전도(顚倒)된 가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암적 존재로 규정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규정되어 공식적인 집회를 금지당한 것이다. 그래서 비밀집회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공개된 장소에서 회집할 수 없었기에 은밀하게 가정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정교회(domus ecclesiae)’로 출발했다. 공개적으로 모일 수 없었고,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은 참석할 수 없는 기독 신자들만의 모임이었기에 이런 비밀 집회를 ‘잠근 동산(enclosed garden)’이라고 불렀다.
아가서 4장 12절에서 빌려온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이었다. 그가 신자들 간의 비밀 집회를 ‘잠근 동산(hortus conclusus)’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교도나 불신자 등 외부인들에게는 닫혀진 비밀 집회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공개 집회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모였지만, 로마제국은 이 마저도 통제하고자 했다.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트라야누스(Traijan, 98-117) 황제조차 어디서든 어떤 형식이나 조직이든, 15인 이상 모이는 집회를 금지시켰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집회의 제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그 첫 번째 조치는 집회의 자유였다.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 시장에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조치가 바로 기독교에 대한 공인(公認)이었다.
공개적인 집회가 가능했고, 몰수되었던 재산은 되돌려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의 자유는 곧 집회의 자유라 할 수 있고, 집회 자유에 대한 통제는 기독교 탄압의 첫 번째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구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에서도 동일했다.
중국은 최근 기독교 예배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집회소에 대한 자기 표현인 십자가를 철거하고 집회소를 통폐합하고 축소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간 안후이성 루안시, 마안샨시, 화베이시, 푸양시 등에서만 250여 교회를 파괴하거나 십자가를 강제로 철거했다. 집회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기간 루안시에서는 183개 이상의 교회 십자가가 철거되었다.
이런 집회 방해와 함께 18세 미만 청소년들의 예배 참석을 금지시켰다. 기독교 박해 국가 23위(오픈도어즈 발표)인 중국에서의 집회 방해 혹은 제한 조치는 기독교 박해의 첫 번째 단계에 속한다.
해방 이전까지 북한은 기독교가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2천여 곳의 교회,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 정권 수립과 함께 기독교는 서서히 멸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취한 첫 번째 조치가 집회 방해였다.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집회를 제한하고 축소하고 감시했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고 투옥시키거나 살해했다. 세 번째 단계는 신학교를 축소하거나 통폐합하고, 후에는 그 마저도 폐쇄했다.
교회당은 몰수되거나 전용되었다. 집회소가 사라지고 공개적인 예배는 불가능했다. 물론 이와 병행하여 ‘어용 기독교 조직’을 이용하였다.
북한에서 기독교 탄압의 결정적 사례가 1946년 11월 3일 주일날 시행된 선거였다. 기독교를 탄압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11월 3일 주일날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예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결의했으나 집회는 통제되었고, 이를 미끼로 지도자들을 체포하였으며, 교회는 서서히 북한 땅에서 사라져 갔다.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기독교 박해의 첫 번째 단계에 속한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기독교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할 당시,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회는 1,900여 곳의 집회소, 20만 성도, 300개 이상의 기독교 학교, 3만 명 이상의 재학생, 270명의 외국인 선교사, 2,300여 명의 조선인 교역자 등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보다 더 높게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통해 외국 여론과 연결돼 있었다. 이런 기독교 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식민 지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의 정책은 일면의 탄압, 일면의 회유라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탄압의 첫 번째 단계는 집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집회를 감독하고 설교를 정탐하며, 교회 지도자들의 동향을 사찰하고 목회자들의 거주 이전을 신고하게 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던 주기철 목사의 거출계(居出屆)가 남아있다. 물론 기독교회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병행했다.
후에는 기독교 집회소를 축소하기 위한 교회 통폐합을 실시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교회가 325곳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 수는 217곳으로 축소되었다. 경남노회 지역에서만 3분의 1의 교회를 폐쇄시킨 것이다. 집회에 대한 제한이나 예배 방해는 기독교 탄압의 시작이었다.
정리하면서
이상에서 집회 제한 혹은 금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역사에 기대어 제시하였다.
이번의 정규 예배 외 집회에 대한 제한 혹은 금지 조치는 코로나19 현실에서 불가피한 잠정적인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한 조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훼손일 수 있고, 자칫 기독교에 대한 통제 혹은 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비의도적이고 잠정적인 요구라 할지라도 후일의 전례가 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서는 비의도성으로 포장된 의도적인 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 불리는 국제적인 위기 현실에서 기독교회가 앞장서서 방역 수칙을 지키고, 코로나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협조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밀집 회합 조직 중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집회를 통제하거나 금지하는 행정명령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상규(백석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