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기념 설교] 해방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크리스천투데이는 지난 9일 경남기독교총연합회 주최 광복절 기념성회에서 이상규 명예교수님(백석대)이 전하신 설교 ‘해방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시편 126편 1-6절)’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과거를 잊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 its past has no future),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해방 75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박정곤 대표회장님과 경남성시화본부 오승균 대표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차례 기념 예배를 드렸는데, 첫째는 매년 3월 첫 주에 드렸던 3.1절 기념예배였고, 둘째는 8월 15일과 가까운 주일에 드렸던 해방 기념예배였습니다.
이 전통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경남의 교계 지도자들이 이런 한국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오늘의 교회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6편에 기대어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과 수난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뒤돌아보는 역사: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
우리나라는 1910년 8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타율에 의해 해방되었던 1945년까지 35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만, 일제의 한국침략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1876년 일본 대표 이노우에(黑田淸隆)와 조선 대표 신헌(申櫶) 사이에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입니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고 명시하므로 청(淸)의 세력(宗主權)을 배제하고자 했고, 1882년 임오군란은 일본 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일 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다 1894-1895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1904-1905년에는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러일강화조약, 곧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선점하게 됩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행정권·사법권·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점진적인 침략 과정을 거쳐,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일합방(韓日合邦)’ 혹은 ‘한일합병(韓日合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한일병탄(韓日倂呑)’이라고 말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조선은 주권을 상실함으로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시작된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純宗, 1872-1926)을 끝으로 51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 때로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배경을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합니다. 우리는 ‘지나사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남아전 지역과 태평양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보통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서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따른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이 일본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하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전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쟁 초기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 전세는 급변하였습니다.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 1945. 2-3)와 오끼나와(沖縄, 1945. 6)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당했고, 중국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일본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역의 경우 이탈리아가 1943년 6월에 연합국에 항복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했습니다. 수도 베를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의 자살로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전세가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게 되자, 1943년 11월 12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로 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의합니다. 이 결의문 작성자는 루즈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는데, 그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7월 17일, 연합국 대표는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라고 선언하여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때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미국은 히로시마(廣島, 1945. 8. 6.)와 나가사끼(長琦, 1945. 8. 9)에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하게 됩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迪官裕仁, 1901-1989)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해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35년간의 질고를 끝내고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광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박정곤 대표회장의 인사말 언급처럼 ‘빛을 회복한 것’입니다.
2. 해방의 의미
그렇다면 이 해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3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빨리 해방을 맞게 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싸워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때 전 인구의 10%인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해 1,700여회의 집회를 하고, 5만여 명이 수감되고, 7천 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1만 6천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독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국 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애국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제국과 제왕을 다스리시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십니다. 그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120년 간의 통일왕국 시대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됐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해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존속기간은 509년으로, 우리나라 조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당시 제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바벨론이 최강국이었으나, 바사라고 불리는 페르시아가 신흥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기원전 549년에는 메대를 정복하여 바사에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메데와 바사를 연합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동시에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메대 바사’ 혹은 ‘바사 메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에 1:3, 18, 19, 10:2, 단5:28, 6:8, 12, 15, 8:20 등).
이 신생 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가 기원전 539년이었습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한 바사의 고레스(Cyrus II)왕은 이듬해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서'(詔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역대하 36장 23절, 에스라 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민족에게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26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포로된 자들을 시온으로 돌리실 때(the captives to Zion)’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토(故土), 곧 두고 온 고향을 의미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해방을 얻는 자유민은 본토로 돌아오는데, 그 거리가 1,200km였습니다. 1차 귀환 때 약 5만 명이 이 먼 거리를 걸어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지배 하에 있다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해방을 주신 이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126:2)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생 제국인 페르샤의 고레스는 이스라엘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된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과거 바벨론이 빼앗아갔던 모든 기병들 곧 지금의 문화재를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해답이 역대하 36장 22절과 에스라 1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of Persi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 신도, 1900여개처의 교회, 조선인 교역자 2천 3백명, 선교사 270명, 3백 개 이상의 기독교 학교, 3만 명 이상의 재학생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를 식민 지배의 성패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회가 반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한국교회를 탄압하여 그 힘을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를 친일 세력으로 물들여 황도주의(皇道主義) 기독교로의 변질시키거나, 일본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를 통해 조선인들을 충량한 일본 국민으로 교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일제는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는데, 첫째는 법적 제제를 가하고자 했습니다. 보안법, 범죄즉결령, 조선 태형령과 같은 일반적인 법령 외에도 한국교회 종교활동을 통제하려는 ‘포교규칙(1915)’을 제령 83호로 공포했습니다. 포교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얻게 하는 등 신교의 자유를 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사립학교령(1911. 8), 사립학교 규칙(1911.10),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3) 등과 같은 법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를 옥죄고 종교교육을 제한했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제한하고 설교를 감시했습니다. 성경 중 출애굽기, 에스겔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설교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일부 찬송가를 금지시키거나 개사(改詞)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찬송가는 1934년 편찬된 신편찬송가였는데,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 만왕, 신앙적 결의, 재림 찬송은 금지곡이었습니다.
특히 만유의 쥬(32장), 면류관 드리세(33), 만왕의 왕(54), 믿음이 세상을 이김(201), 하나님은 피난처(206), 십자가 군병(222), 영원한 문아 열어라(286), 여호와만 섬기세(337), 의의 길(385)를 부르지 못했습니다.
자구 수정을 강요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전능왕(7장)’을 ‘쥬시여’로, ‘만유의 대왕(10)’을 ‘우리의 쥬님’으로, ‘만유의 쥬(38)’를 ‘우리의 쥬’로, ‘만유의 주제(48)’를 ‘우리의 쥬님’으로, ‘태평왕(56)’을 ‘우리 쥬’로 변경하여 부르게 했습니다.
넷째, 기독교회를 줄이기 위해 교회를 통폐합시켰습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개처 교회가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경남노회 지역 교회의 3분의 1을 폐쇄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박해는 우상숭배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강요는 1935년부터 시작됐는데, 이때부터 10년간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습니다. 신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이 일로 200여개 처교회가 폐쇄되고, 2천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하신 대표적인 경남의 인물이 최상림, 주기철, 이현속 장로 같은 분들입니다. 이처럼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이 패망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은 길어야 10년입니다. 권불십년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투옥되어 있었으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사악한 일제 권력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일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던 26명(평양감옥 20명, 대구 3명, 부산 2명, 청주 1명)이 8월 17일 감옥문을 열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입니다만,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독교 신자를 비롯한 민족 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 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에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이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석방된 것입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이들은 다 처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수사건이 된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 위선, 계략과 음모와 같은 인간의 모사(謀事)는 한줌 모래 위에 쌓는 누각일 뿐입니다.
(일제의 교회 지도자 학살음모, 곧 보호관찰령 제3호가 알려진 것은 해방 이후였고, 이 정보는 종로경찰서 형사주임이었던 최운하(崔雲霞)의 폭로에 의해 공개되었습니다. 일제의 이 음모는 사학자 문정창에 의해 확인되었고, 그는 그의 ‘국군일본 조선강점 36년사’ 하권(449-550쪽)에 이 점을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일제의 이 사악한 음모가 있었음을 그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The Christians of Korea)』이란 책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해방기념 주일을 지키고 자유를 주신 하나남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갈 5:1)”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는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 하와이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해방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있어, 어떤 체제의 나라를 건설하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해방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었습니다.
우리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게 된 것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였습니다. 일본과 홀로 싸우며 큰 희생을 치르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대(對) 일본전에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계속 미루다 종전 6일 전에 참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이 곧 항복하자 소련은 별 희생 없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전 선언 후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8월 12일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인민위원회 중심의 공산주의 독제정권이 북한에 자리잡게 됩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소련군 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미 군정(美軍政,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실시되는데, 당시 남한은 혼란했습니다.
그 혼란을 해방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 정치 결사체가 난립했습니다.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 등이 조직되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은 이승만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허위로 끌어들이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 안이 발표되자 민족 세력 중심에 있던 이승만, 김구,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좌익은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및 좌파 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전자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후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결국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 결렬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독자적 정부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남한에서 좌익들의 반발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반미운동을 선동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공산화된 북한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한의 독자적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를 주장한 이가 이승만이었고 후자를 지지한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반대에도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올라갔으나 본격적인 회담도 못한 채 이용만 당하고 빈손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북 협상의 실패로 김구, 김규식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 결과에 따라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 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주일인 5월 9일 선거를 하려 했는데, 일식(日蝕) 예보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여 하루 늦춘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의도로 일부러 주일 선거를 실시했지만(1946. 11. 3). 남한에서는 주일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선거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보통·평등·비밀 원칙에 입각한 민주적 방식의 선거였고,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스위스(1971)보다 앞섭니다. 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4.3 폭동이 발생했던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첫 국회, 곧 제헌국회를 개원하게 됩니다. 이 때가 오전 10시였습니다. 이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이윤영 의원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는데, 서울의 종로구 갑 지역구 의원이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하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기도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현신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제헌국회의원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공문서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 속기록 제일 앞에 바로 이 기도문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이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회집한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했습니다.
8월 15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독립(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사에서 그날의 행사가 우리 민족의 해방과 건국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여,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는 찬성 48, 반대 6표, 기권1 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민국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결의안, 제195-III호).
이어 미국을 시작으로(1949. 1. 1.) 개별적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승인이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때 참전이 통과되었고,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원래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서울의 미군은 평양의 소련군에게 물자의 자유로운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38선을 차단합니다. 북한을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자 전문에서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소련식 공산정부를 세우기보다는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기만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협조하지 않자 1946년 2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해방된 지 6개월 만에 정부를 세워놓고는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선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남한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니 북한은 9월 9일 이미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 노선을 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헌이며, 이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6년 8월 미 군정이 조사한 여론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습니다.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反共) 노선을 고수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1875-1965)의 큰 업적은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제로 확립한 일입니다.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인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는데, 11월 28일(수요일) 김규식·김구와 미군 아놀드 대령과 같이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는 황치헌 목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고 인사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 말: 우리의 과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게 됐고, 오늘 7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탄생했거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85개국인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해방 당시는 유엔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아 살던 최빈국이었고, 휴전 당시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나 70여년이 지난 2017년 3만 달러가 넘어 OECD 회원국 가운데 22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는 7번째로 3만 달러를 달성해 3050클럽(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진입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프랑스·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자유와 인권을 탈취당한 채 독제정권하에서 신음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게 되었고, 짧은 시기에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다 성취했으나, 북한은 공산체제 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마크 크라머라는 사람이 쓴 ‘공산주의의 검은 역사(The Black Book of Communism)’라는 책을 보니 공산주의 혹은 공산국가에서 죽임을 당한인구가 무려 9천 4백만 명, 곧 1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만 기근, 문화혁명, 대장정 기간에 6천 5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에서 2천만 명, 캄보디아에서 2백만 명이, 북한에서 3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3대 세습국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혹은 성경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투옥된 자가 5-7만 명에 달합니다.
월드워치리스트(WWL: World Watch List)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19년째 세계 최악 기독교 박해국 제1위라고 합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12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살 수 없다며 생명 걸고 탈북한 이가 3만 5천명에 달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백주에 공산주의가 좋다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다니고, 김정은 정권을 칭송하는 백두칭송위원회라는 괴이한 조직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혼란합니다. 해방정국과 비슷합니다.
1947년 해방을 기념하는 주일, 손양원 목사가 부산 제일영도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좋습니까,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그때만 해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무지했고 분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주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경주의입니다. 여러분,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순교자로만 아는데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좌익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받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 잡혀 끌려다니다 28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북한은 일제 35년, 공산정권 하에서 75년 꼭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김정욱(2013. 10), 김국기(2014. 10), 최춘길(2014. 12), 고현철(2016. 7), 김원호(2016. 7), 함진우(2016. 7) 선교사입니다. 북한 주민과 탈북민들을 도와주거나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혔고,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등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형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은 부서지는 육신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억류된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이 오만방자해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죽은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유해를 발굴하고 정중히 모시고 예우를 다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구출하지 않습니까?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의 구출과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정한 해방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이상규 명예교수(백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