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호박을 따며
잠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낼 기세가 역력하다.
큰 태풍이 지나기 무섭게 또 비가 내린다. 올해는 참 비도 많다. 기록적인 장마에다 간헐적인 소나기까지 퍼붓는 탓에 과일은 단맛 들 새 없다.
각박한 세상이다. 각박하다고 말하기조차 격세지감이 드는 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다 못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가 고착화되었음이랴.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사라지고 이웃과의 교감이 줄어들면서, 자녀 교육은 물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맞벌이 가족이 늘어나면서, 인간애로 이어지던 시절의 풋풋함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마스크를 써야만 사회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은 도무지 탈출구 없는 미로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다가 공공장소에서 기침 사래라도 걸려 재치기를 해대면,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매미 소리 정겨운 마을 어귀 정자에서 참외 수박을 배불리 먹던 시절은 언제였던가. 물장구 치던 개울물의 개구쟁이들, 주인 없는 초지에서 소꼴을 먹이며 뛰놀던 막둥이들은 지금 무얼 할까. 해질녘 밥 짓는 굴뚝 연기 정겨운 그 시절을 언제 지나왔는가.
모처럼 편한 의복으로 뒷짐 걸음을 걸어본다. 각박한 세상이라고 푸념을 들어야 하는 귓불의 고단함과, 세상사 말세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입술을 닫고 부채 든 손을 저어 본다.
담장 가득 호박 넝쿨이 무성하다. 성근 호박 서너 개를 안고 허리를 편다. 찬바람 날 때까지 놔두면 늙은 호박이 되어 맛난 호박죽이나 호박시루떡에 쓰일 호박이다. 이때쯤 서둘러 따서 씨 발라내고 된장찌개나 빈대떡을 붙여먹어도 맛깔 난다.
호박 사이 엉겨 달린 토마토가 붉다. 한 입 베어 문다. 가지에서 붉게 익은 토마토가 작지만 제 맛이다. 멀리서 암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산(長山) 산행 끝에 시골길 걸으며 햅쌀밥 지어먹던 옛 친구들이 다가온다.
어느새 발걸음은 동네 뒷산이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감싼 여인들이 지나간다. 구슬픈 트로트 음악이 허공을 친다. 중년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걷는다.
여러 사람들이 산길 벤치에 모여 세상만사를 막걸리 잔에 담아 나눈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 광화문 집회의 파문, 여행할 수 없는 지구촌 환경, 무어라고 말하고 싶은 갓난아기의 옹아리 같은 재담, 무어라고 말하고 싶은 백세 노인의 유언 같은 담소, 세상만사가 막걸리 안주처럼 방향 없이 산바람에 매달린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번 주일 예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한 음성 뒤에, 그리스도 언약을 상실한 자들의 예배는 아벨의 제사가 아니다!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뇌성이 고막을 찌른다.
당장이라도 무릎걸음으로 통곡해야 하는 애달픔이 가슴을 메인다. 풀 죽은 호박꽃이 햇살 펼칠 그날을 종용하는 듯 하다.
하민국 목사
웨민총회신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