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스더 4장 14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 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터 4장 16절)”.
9월 5일 한국기독공보 6면에 <기독 원로들, “이웃 생명 위협하는 교회 안 돼”>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내용은, 교계 원로들께서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교회발 확진 사태에 대한 사회에 뜻을 표하고, 최근 전광훈 및 사랑제일교회 등 한국교회 일각에서 불거진 범죄적 일탈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읽어보면서, 필자는 한없이 슬펐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파를 초월한 한국기독교 원로들로 구성된 한국 기독교 원로모임은 최근 교회발 코로나19 확진 사태에 대해 사과하며, 지난 8월 24일 코로나19 위기와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방역 체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려 국민의 삶과 생명을 위협하는 무도한 폭거일 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있는 나라 경제에도 악 영향을 끼쳐, 그러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크나큰 죄악이라고 규정하며, “전광훈 목사를 더 이상 목사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인이나 관련 단체들에 대해서도 신앙을 내세우는 전광훈의 주장이나 행태에 미혹되거나 거기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주장이나 행태는 참된 신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며, 관련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전광훈을 목사로 호칭하는 일체의 보도 행위를 중단하여 주기를 당부드린다”고 했습니다.
또 “전광훈이라는 한 사람이 목사라는 허울 속에 반기독교적 행각을 목사로서 일반인에게 여과 없이 보도되는 동안,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 숨어서 헌신해 온 수많은 목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일부 원로목사들께서 왜 이런 성명서를 발표를 했는지 참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필자는 예전 기사에도 언급했듯, 전광훈 목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귀감이 되며, 기독교인이라면 이를 통해 한 번쯤 자신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계 원로라는 분들이 여태 가만히 계시다가 왜 하필 이때 성명서를 내는지 참으로 의뭉스럽습니다. 설교 때마다 ‘기름 부은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왜 전광훈 목사에게는 돌을 던지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 역시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에 죽일 수 없다며,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믿고 사울 왕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죽게 되었을 때, 무기를 든 자신의 부하에게 칼로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그는 왕을 죽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이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려죽고 말자, 곁에 무기를 든 병사 역시 사울의 죽음을 보면서 칼 위에 엎드려, 자신의 주군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 후 3일째 되던 날, 사울의 군대 한 병사가 다윗에게 나아옵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이고 돌아와 시글락이라는 곳에서 이틀을 머물렀고, 사흘째 되는 날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와 말했습니다.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나를 죽여 달라고 하여 그가 살수 없음을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분히 여겨,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부하를 시켜 그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해서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목사라고 부르기조차 할 수 없도록 언론에 부탁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요!
그 원로들은 공산국가도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던 분들 아닙니까?
왜 나라를 위해 온 정열을 다 바쳐 헌신하는 애국지사를 나쁜 사람으로 여론화하고 매장하려 하는지, 필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이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뿐입니다.
군사독재 시대에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뜨겁게 기도로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독교인들 끼리 편을 가르는 모양새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오히려 불신만 키우고, 하나님 마음에 큰 상처를 제공하는 것임을 왜 모르시는지요!
지금 의료계를 보십시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 난국을 잘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참 정신으로 돌아가,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코로나19라는 카드를 사용해 올가미를 씌우려는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가야 하겠습니까?
소모임 금지를 넘어, 비대면 예배가 무슨 말입니까?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다 하나님 나라로 간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 때마다 영과 진리로 온 힘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서,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었던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는 정부의 방침을 앞장서서 따르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같은 하나님의 종을 자신들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 해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는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당당하게 나서서 외치시길 바랍니다.
뒤에서 쓴소리만 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오셔서 신앙인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그리고 미래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나서서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사울 왕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부하는 사울이 그토록 죽여달라 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목을 베어 다윗에게로 가면 큰 영광이 있을 법도 했지만, 끝까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죽자 그 부하 역시 왕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정신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더도 생각해 봅시다. 바사 왕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페르시아식 이름이고, 히브리 이름으로는 하닷사입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궁중 생활은 호화와 사치가 극에 달해 있었던 반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선지자들로부터 공의를 행하라는 가르침을 들으며 자라온 유다인들의 눈에, 이런 구조적 모순과 불공평은 아주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의 잔인하고 독재자적인 성격은 결국 왕후와의 사이에서 권위와 복종이라는 갈등을 빚게 됩니다.
마침내 아하수에로 왕은 나라를 위한 일벌백계를 선택해 왕후를 폐위시켰습니다. 이는 후일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단초를 제공합니다.
본문에는 이후 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으로 인해 바사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다인인 것을 알고, 모든 유다인들을 죽이라는 조서를 전국 각지에 반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모르드개가 하만의 눈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르드개 자신은 물론, 자신의 백성을 다 죽이라는 조서를 내려 보냈다는 말을 전해들은 모르드개는 분개하며, 왕후가 된 자신의 조카 에스더를 찾아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에스더는 삼촌인 모르드개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 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며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이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의 민족인 유다 백성 모두를 살리는 실로 위대한 일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정부에 아부하며 그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이러한 승리는 고사하고 모두 떼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구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경을 읽는 수준으로만 그치지 말고, 그러한 인물들의 삶을 충실하게 들여다 보며 깊은 성찰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믿지 않는 비신자들 가운데, 전광훈 목사를 지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데, 기독교인들은 왜 그토록 서로 싸우고 총질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으로 무안해지며 할 말을 잃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신자들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면서 왜 그렇게 교파와 교단이 많은지, 나라를 구하겠다고 앞장서서 일하는 전 목사를 왜 그토록 증오하며 목사의 자격을 박탈하려 하기까지 하느냐며, 심히 애석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지적하다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윗 왕에게 나아가 잘못을 충고합니다. 우리 교계에서도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올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당당히 맞서 충고할 수 있는 사랑의 지도자들이 속출해야 할 것입니다.
눈치나 보면서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마음을 빼앗기는 지도자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상과 정신에는 어긋나며, 하나님의 방법인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데만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 땅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 난세에도 하나님은 우리 신앙을 지켜줄,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은 지도자를 보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제 기독교계는 하나가 되어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이 꿈꾸며 행복해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헛된 탐심과 교만으로 권력을 누리려 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그 앞에서 아부하며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신앙인들은 이제 이를 그치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셔서 고요하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럴 때 교회는 다시 회복하게 되고, 초대교회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