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언약”: 청교도 신앙의 기초

|  

[김재성 칼럼] 뉴잉글랜드 청교도신앙과 현대 복음주의 교회 (4)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청교도의 언약 사상과 실제적인 실행방법들은 뉴잉글랜드에서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638년과 1643년에 제정된 잉글랜드의 “국가언약”이라는 문서가 만들어지면서 언약사상이 가장 중요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 언약문서들에 주요 지도자들과 교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다 서명했다고 하였다. 목숨을 걸고 왕의 명령에 저항하면서, 국가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정의롭고 건전한 나라를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었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사상을 사회정치적으로 적용하고자 분투노력했었고, 마침내 전제군주를 처형하고 올리버 크롬웰이 정치를 펼치는 “청교도혁명”을 이루었었다.

초기 뉴잉글랜드 이민자들은 그들이 떠나 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언약사상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서도 국가언약을 잊지 않으면서, 더 뜨거운 심장으로 언약의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잉글랜드에서 체험했던 청교도들의 경건한 공동체를 만들고자했던 열망이 그들의 심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영국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과 젊은 대학생들은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지역 교회에 모여서 교회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열렬히 토론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초기에 설교자들을 통해서 전파된 것들은 오직 성경에만 의존하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교회언약”(church covenant)이 강조되었다. 새로운 땅에서는 완전히 성경적인 교회를 건설하는데 집중했고, 모든 생활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장소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집중하는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 교회가 최우선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교회에 속한 회원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와 약속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개념으로 자리 매김을 했다.

“교회언약”을 중시했던 뉴잉글랜드에서의 교회의 형태는 모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회중교회 모습이었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에섹스 지방, 데드햄에서는 설교자들의 회합을 열어서 그들이 만나는 성도들의 문제들을 다루는 경건한 설교의 기회들을 논의했다. 그리고 주일성수를 강조하기로 합의하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각 지역에서는 “말씀 강좌”라는 모임을 통해서 교수들이나 저명한 목회자들이 지역의 교구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 강단 설교의 진수를 전달했다. 이런 날에는 하루 종일 강의를 듣고,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평신도들도 신앙과 윤리의 문제를 놓고서 조직화된 토론모임을 이어갔다. 성경의 진리를 보다 더 잘 이해하려고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거기에는 그 어떤 이들이 높고 더 위대하다고 하지를 않았고, 모두 다 평등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월등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발휘했지만, 주교나 대주교처럼 위로부터 아래로 명령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이 뉴잉글랜드에서 그대로 펼쳐졌다. 윈트롭에 이어서 도착한 토마스 후커 (Thomas Hooker, 1633), 존 데븐포트 (John Davenport, 1637), 휴 피터 (Hugh Peter, 1635) 등은 지방 도시에서 함께 모여서 협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은 새로운 기초이자, 중요한 기둥을 세우는 사역이었다. 게다가 일부 목회자들은 이미 네델란드에서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를 했었는데, 이러한 경험들이 가미되어졌다.

“교회언약” (church covenant)이라고 부를 수 있는 회원으로 가입하는 자들의 엄숙한 신앙서약과 맹세가 뒤따랐다. 교회 언약의 실제적인 시행은 물론 세례와 성찬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칼빈의 성례론을 따라서 성경적인 약속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강조되었다. 우선 모든 성도들이 자유롭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으며,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고 바르게 교육을 받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선출하여 성도들에게 손을 얹고 사역을 하는 영적인 임무를 맡기게 되는 것이고, 또한 자신도 피택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자신도 함께 감당해야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상적으로는 교회가 두 명의 목사를 갖고자 했는데, 평상적인 설교를 하면서 성도들을 심방하는 목회목사와 교리를 분별하여 설명하는 신학적인 교사 목사를 갖고자 했다.

청교도들이 교회에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교회의 자치권과 독립성이다. 존 코튼이 앞장서서 주장했던 바, 각 회중마다 독립성을 확보하여, 자체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한 지역 교회가 세워지면, 그 회중을 중심으로 모든 결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교회를 지배하는 그 위에 높은 기관이나, 혹은 교황청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체제란 있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로마 가톨릭과 잉글랜드 국가교회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구조를 실행에 옮겼다.

다만 회중교회의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회중교회 체제가 장점을 갖고 있지만, 이처럼 각 지역교회가 자체적인 결정권을 가진다면, 가히 무제한적인 결정을 남발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마다 자기들의 고유한 결정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무정부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목사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 중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입증하고,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선포해서 성도들을 인도해 나갈 수 있는 목회자들을 선택하였다. 초기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회 구조를 살펴보면, 말을 하는 소수의 귀족적인 지도자들과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다수의 성도들로 구성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서로 결합해 있었다. 회중들은 목회자의 결정에 대해서 존중하는 자세로 임했고, 절제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할 경우에는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모임이 큰 역할을 했다. 보이지 않게 하나 된 기독교 공동체의 모임이 유지되었다. 지역교회 목회자들은 비공식적으로 회합을 열어서, 새로운 회원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형식을 취해서, 장로교회의 노회와 같은 기능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정식으로 장로교회의 노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것은 초기 청교도들이 이미 회중교회 체제를 결성한 훨씬 후에 1706년에 회집되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예배중심 생활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청교도들의 경견한 열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기존 국가교회 체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이었으므로, 로마 가톨릭의 주교정치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냈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완전히 개혁교회의 모델로 구성되었다. 물론 아직 거대한 건물을 세우지 못했기에, 지방에서는 지역모임을 갖던 공회당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책상 하나를 앞에 두고서, 목회자가 진행하는 단순한 예배형태를 취했는데, 성찬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회의를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였을 뿐이다. 잉글랜드에서는 “공중기도서”에 나오는 대로 예배를 진행해야만 했었는데, 청교도들은 그 일부를 따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에서는 전혀 예배지침서가 없었다. 교회언약의 핵심은 엄격한 주일 성수로 실행되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는 것은 언약백성이 시행할 조건들을 따라가면서 순종하는 삶으로 인식되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처럼 여전히 뉴잉글랜드에서도 중요한 경건의 요소였다. 설교는 목회자가 성경 한 장의 분량을 읽고 난 후, 그 본문을 토대로 강해를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회중교회들은 시편찬양을 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성도들의 간증을 발표하기도 했고, 메시지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해 달라는 질문을 허용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기도와 축도로 주일 오전예배가 폐회되었다. 오후예배에서는 회중들이 모여서 동일한 예배를 다시 드렸는데, 오후예배에는 꼭 그 교회 소속 교인들이 아니어도 지역사회의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씀을 듣는 데에 집중했다. 오전예배는 멀리 떨어져 있던 교회에 나갔다가, 오후 예배시간에는 가까운 곳에 찾아오는 경우들도 있었다. 아무튼 오후예배 시간에도 모든 성도들이 다 똑같이 다시 모이도록 노력했다. 지금도 청교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은 여전히 아침예배와 오후 다섯 시에 모이는 저녁예배 출석하는 인원이 거의 동일하다. 필자는 그러한 청교도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바쁜 세상에서 온전히 주일을 예배에만 집중하는 성도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로 놀라운 체험이다.

목회자가 없는 경우에는 평신도가 설교하기도 했는데, 존 윈트롭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보편적인 경우에는 전문적인 신학수업을 하고,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온 안수를 받은 목사가 설교를 전담했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청빙과정에 있거나, 건강이 악화되었거나, 특별한 경우에는 설교하는 권한을 허락받은 평신도들이 대행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한 달에 한 번 주일 오전예배 시간에 성만찬을 나눴다. 목회자가 기도를 드리고,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축복의 권면을 한 후에, 오직 회원 성도들에게만 나눠주었다. 마치는 기도로 폐회되었다. 세례는 오후 예배 시간에 주로 시행했는데, 물을 뿌리거나 씻는 행위가 수반되었다. 유아세례의 경우에는 부모 중에서 한 쪽만 출석하는 교인이면, 누구나 자녀들에게 시행되었으며, 로마 가톨릭처럼 영적인 부모대행 제도(god-parents)는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123 신앙과 삶

CT YouTube

더보기

에디터 추천기사

김정석 감독회장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 서울시청 합동분양소 조문

김정석 감독회장, 무안공항 사고 조문으로 새해 시작

방명록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 기도와 지원에 최선 기울일 것 사회 주요 문제 적극 나서겠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김정석 감독회장과 본부 임원들, 그리고 부장들은 을사년 새해 첫 날인 1월 1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로 희생당한 179명의 합동분향소가…

3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 관저 주변 상황.

“현직 대통령 체포 시도, 운동권 출신들의 폭거”

내란죄 확정도 안 됐는데 공공연히 확정범? 고도의 통치 판단인지 헌재 결정 기다려야 대행의 대행도 탄핵 압박, 헌법재판관 임명 대통령 체포 영장에 ‘법 예외’ 적시 기막혀 대통령, 직무 정지됐으나 ‘현재 국가 원수’ 체포 동조하는 세력, 민주주의 죽이는…

엔딩 파티

살아 있는 사람 위한 장례식 ‘엔딩 파티’, 긍정적 인식 높아져

건강한 장례문화 확산을 위한 ’엔딩 파티(Ending Party, 餘生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엔딩 파티’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장례식’으로, 죽음을 앞둔 이가 지인들을 초청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사)하이패밀리가 지난 12…

세이브코리아(SAVE KOREA) 국가비상기도회

“기도로 세워진 대한민국, 다시 기도로 일어나자”

대한민국이 헌정질서 붕괴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이를 기도와 행동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세이브코리아(SAVE KOREA) 국가비상기도회가 오는 11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의사당대로에서 시작된다. 이 기도회는 이후 매주 토요일 여의도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

수도권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박종호 목사

수기총‧세이브코리아 “‘내란 수괴’ 단정? ‘무죄추정’ 따르라”

세이브코리아, 수기총을 비롯한 1200여 시민단체들이 최근 대통령 탄핵 및 내란죄 논란과 관련해 국회와 언론, 공수처의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국회가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고 있으며, 언론이 확정되지 않은 ‘내란죄’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쓰…

WEC 국제선교회, OW, 오퍼레이션 월드

‘세계 기도 정보 결정판’ 오퍼레이션 월드, 출간 60주년

“세계 기도 정보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오퍼레이션 월드’(Operation World, 이하 OW)가 출간 60주년을 맞았다. WEC 국제선교회(WEC International)의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 선교사가 1964년에 발행한 초판은 불과 32페이지로 구성돼 있으며, 여기에는 손으로 그린 지…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