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 (上)
최근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예배’가 ‘뉴 노멀’로 자리잡으면서 ‘온라인 예배’를 넘어 ‘인터넷 성찬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우병훈 교수님(고신대)의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를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찬은 그리스도 직접 제정 의식, 임의 결정 안돼
자신 살피거나 다른 성도들 상황 돌아보기 힘들어
풍성한 교제의 의미 축소, 의미 훼손 위험 농후해
1. 들어가며
‘인터넷 예배’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이제 ‘인터넷 성찬’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 글은 성경적 원리와 신학적 원리에서 봤을 때 ’인터넷 성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목적으로 작성됐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터넷 예배’는 주일에 온 성도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를 인터넷을 통하여 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 성찬’은 그러한 ‘인터넷 예배’ 도중 인터넷 방송에 나오는 목사의 지도를 따라 성찬을 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인터넷 예배’는 코로나19로 인해 한시적으로 허용된 가슴 아픈 ‘타협(compromise)’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 예배’가 허용된다 해서 ‘인터넷 성찬’까지 허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2. 성경적 근거
2.1. 핵심 구절(locus classicus)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찬식에서 읽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이 구절들에서 알게 되는 성찬의 기본적 원리는 아래와 같다.
2.2.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23-26절)
먼저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라는 것이다.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헬라어 파라디도미) 성찬은 자신이 임의로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헬라어, 파라람바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들 ‘파라람바노’와 ‘파라디도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소급되는 진리(앎)와 행위(삶)의 수납과 계승을 뜻한다.
기독교회는 사도신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를 믿음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교회의 단일성, 거룩성, 사도성, 보편성이라는 4대 속성이 나온다. 그 중에서 사도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속성을 근거시켜 주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사도성에서부터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성은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 행할 때 확보된다. 우리가 왜 성찬을 행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기념하라고 직접 명하셨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따라 행해야 한다. 목사 개인 혹은 개체교회가 성찬의 형식이나 방법에 대해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식탁에 초청받은 손님들이며, 목사는 그 식탁에서 수종드는 종들이다. 수종드는 자가 어찌 임의대로 식탁을 주관할 수 있으며, 손님이 어찌 주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식물을 먹을 수 있겠는가?
2.3.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23-25절)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식사 도중에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성찬은 로마 가톨릭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제사’가 결코 아니다. 성찬은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공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공동의 식사 교제를 하고 성찬을 행하였다. 그러다 보니 애찬과 성찬이 함께 섞여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말씀 예배와 성찬 예배를 분리하기도 했다.
교회사가들은 2세기쯤 성찬 시행이 애찬과 분리되었고, 동시에 말씀의 예배와 성찬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추정한다(P. Drews, “Eucharistie,” in PRE, 3rd ed. V:562).
물론 성찬은 단순한 공동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티슬턴, 『고린도전서』, 323). 공동의 식사라면 어느 개인의 집에서 행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행하는 공동의 식사’ 가운데 행해지는 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집’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비시킨다(고전 11:22).
이것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 성찬은 ‘새 언약의 식사’라는 사실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비된다. ‘옛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식사를 ‘가족 단위로’ 진행하였다(출 12:21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그것은 “가족이 행하는 제사”였다(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하지만 “새 언약” 하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모인다. 교회 회원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로 모여서 함께 새 언약의 공동식사인 성찬에 참여한다.
2.4. 성찬은 공예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일 때에’라는 표현을 쓰며, 34절에서는 ‘모임’이라는 표현을 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33절에서는 동사(모일), 34절에서는 명사(모임)로 각각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는 모두 동사 형태인 “쉰에르코마이”이다.
17절에서 ‘모임’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18절에서 ‘모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역시 ‘쉰에르코마이’이다. 성경 사전들은 이 단어가 ‘예배드리기 위해 회중이 모이는 것을 표현하는 사도 바울의 특수 용어’라고 설명한다(EDNT; TDNT).
바울은 이 단락을 여는 구절들인 17-18절과 닫는 구절들인 33-34절에서 ‘쉰에르코마이’라는 단어를 무려 4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성찬의 문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어휘적 일관성[lexical coherence] 기법).
18절과 22절에서도 바울은 ‘교회(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자신이 다루는 이 성찬이란 주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성찬은 공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회원이 다 함께 참여하는 성례이다. 여기서 “공예배를 위해 모인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성찬이 “공예배”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 행해지는 것은 부적절함을 뜻함과 동시에, 성찬이 “모이지 않은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 역시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예외적인 사항들(‘환자들과 고립된 자들을 위한 사적 성찬’의 문제)은 아래에서 교회사적 근거를 살필 때에 다루도록 하겠다.
2.5. 성찬은 자신을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린도교회에서 성찬이 문제가 된 것은 ‘분쟁들(헬라어 스키스마타)’ 때문이었다(18절; 고전 1:10 참조). 그리고 그 분쟁의 원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자들이 (지체 높은 손님을 위한 ‘트리클리니움’이라는 방에 설치된 장의자에 엎드려 누워) 성찬의 음식을 먼저 배불리 먹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은 (신분이 낮은 손님을 위한 ‘아트리움’이라는 방에 조밀하게 서서) 배고프게 된 일이었다(21절).
고린도교회의 분열(고전 1:10)은 주의 거룩한 성찬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바울이 자주 그렇게 하듯, 이번에도 바울의 처방은 근원적인 데서부터 출발하여 실제적인 데로 나아간다.
근원적 처방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찬의 의미’를 다시 알려주는 것이다. 실제적인 처방은 성찬을 먹기 전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28절)”, “주의 몸을 분별(29절) 한 후”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살피거나(철저한 검증; ‘도키마조’) 분별하지(분명한 이해; ‘디아크리노’) 못할 바에는, 차라리 성찬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9절).
여기서 자신을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두 가지 적용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성찬의 원래 의미를 잘 깨달아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마음을 드높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도들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성찬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뿐 아니라 신자들 사이의 연합 또한 확인하고 경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적용적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빠져 있는데 다른 하나가 채워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2.6. 성경적 근거에서 본 ‘인터넷 성찬’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라 아래와 같이 결론내릴 수 있다. 첫째, 성찬이란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의식이다. 따라서 성찬의 방식은 목사나 개체교회가 임의로 결정해서는 안 되며, 교회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신중한 사안이다.
둘째, 성찬은 교회 회원 전체가 한 가족으로 참여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며 공예배 시간에 진행되어야 한다. 성찬은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인 회중이 참여하는 식사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은 사람들이 사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셋째, 성찬은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성찬 참여 전에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교회적 심방과 권면, 치리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성찬을 위한 준비에는 자신 개인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상황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들에서 성찬이 있는 주일에 헌금을 드린 것은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전통을 가지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런 고려 없이 성찬을 행하는 것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인터넷 성찬’을 평가해 보면, 그것이 오히려 성찬의 원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는 아주 안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은 아래의 신학적 근거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3. 성례론적 근거
3.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성례
로마가톨릭은 일곱 가지 성례를 가르친다. 영세 성사, 견진 성사, 성체 성사, 고백 성사, 종부 성사, 신품 성사, 혼배 성사가 그것이다. 영세 성사는 세례, 견진 성사는 일종의 입교식, 성체 성사는 성찬식, 고백 성사는 고해, 종부 성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 신품 성사는 사제 임명, 혼배 성사는 결혼과 관련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두 가지 성례만을 가르친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개신교회들이 이 두 가지 성례만을 인정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신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눅 22:19).
3.2. 세례와 성찬의 다른 점
세례와 성찬이 다 같은 성례이지만, 다른 점도 있고 같은 점도 있다. 먼저 세례와 성찬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서로 다르다.
첫째, 세례가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성례라고 한다면, 성찬은 언약 안에서 교육받는 성례이다.
둘째,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성례라고 한다면(롬 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재확인하고 누리고 감사하는 성례가 된다(고전 11:24 “축사하시고…”).
셋째, 세례는 단회적이지만, 성찬은 계속 반복된다. 세례와 성찬 모두 죄 사함을 받은 것을 확인하는 성례이지만, 세례는 중생과 관련되고 성찬은 그 이후의 지속적 회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넷째, 세례는 사람의 역할이 수동적이라 한다면, 성찬은 사람의 역할이 능동적이다. 세례는 수동적인 중생의 성례다. 그래서 세례는 그저 고개 숙여서 받는 것이다. 반면,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영적 생명의 양육을 위한 성숙의 성례다. 따라서 성찬을 받는 자들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 즉 먹고 마심을 포함한다.
3.3. 세례와 성찬의 공통점
하지만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이 가지는 공통점도 있다.
첫째, 세례와 성찬 모두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여 교회에 주신 성례이다.
둘째, 세례와 성찬 모두 말씀과 연합할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성례는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 visible word)’이라고 불린다.
셋째, 세례와 성찬 모두 믿음이 있을 때에 의미가 있다. 믿음 없이 세례 받는 것이 무의미하듯, 믿음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무가치한 먹음(manducatio indigna; unworthy eating)’이 될 뿐이다. 세례와 성찬은 이미 있는 믿음에 도장(印)을 찍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이 없던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음이 있는 자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믿음이 공고해진다.
넷째, 세례와 성찬 모두 공예배 안에서 시행된다. 모든 성도가 모인 공예배에서 세례가 시행되는 것이 가장 합당하듯, 모든 성도가 모인 공예배에서 성찬이 시행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다섯째, 세례와 성찬 모두 말씀의 집례자가 시행한다.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세례를 베풀듯,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성찬의 떡을 떼며, 성찬의 잔을 나눈다. 직분자가 없는 성례는 사실상 집행될 수 없다.
여섯째, 세례와 성찬 모두 언약적 관점에서 파악된다. 세례가 구약의 할례에, 성찬이 구약의 유월절 식사에 비견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언약적 통일성에 근거한다. 또한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듯이 신약 시대에도 신자의 자녀가 유아 세례를 받는 것은, 신자와 그들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주어진다는 언약 신앙에 근거한다.
일곱째, 세례와 성찬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와 신자들과의 관계 둘 다를 함의한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신자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의식이다.
여덟째, 세례와 성찬 모두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된다. 세례를 받았다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된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이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게 된다.
아홉째,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들의 경건의 표현이며 고백이다. 따라서 참된 신자는 세례와 성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례를 행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성례를 잘못 행하는 것이다. 연인들 사이에서도 잘못된 표현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함만 못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3.4. 성례론적 관점에서 본 ‘인터넷 성찬’
이상과 같은 성례론적 관점에서 ‘인터넷 성찬’을 평가한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인터넷 성찬’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인터넷 세례’도 가능한가?”하는 질문이 당장 제기될 수 있다.
세례와 성찬은 성례론적 관점에서 같은 지위를 가진다. 둘 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말씀의 사역자가 행하는 새 언약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사역자만 세례를 줄 수 있다면, 성찬 역시 말씀의 사역자만이 집례할 수 있다.
평신도에 의한 세례가 불가능하다면, 평신도에 의한 성찬도 불가능하다.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중 집례자의 인도에 따라 성찬식을 행해도 된다면, 세례 역시 그런 형태로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세례 받음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기에 위급한 경우 행해지는 ‘평신도에 의한 세례’를 변호하지만, 실재적으로 이런 입장이 전적으로 견지되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생기는 폐해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성찬’을 주장하는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신도와 목회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평등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씀의 집례자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등한히 여기는 것이며,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그러한 직무를 받지 못한 자에게 유기하는 것이다.
둘째, ‘인터넷 성찬’은 이상과 같은 성례론적 의미들을 오히려 갉아먹고 왜곡시키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우선, 성찬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연합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 연합도 확인하는 것이라면, ‘인터넷 성찬’은 부적절하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잔을 함께 마시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각 가정별로 독립적으로 성찬을 행하는 것은 성찬이 지니는 그 풍성한 교제적 의미를 완전히 축소하고 말 것이다.
다른 폐해들도 예상된다. 가령,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인터넷 예배’를 드리면서 ‘인터넷 성찬’을 함께 한다면, 그것도 정당한 은혜의 수단이 되겠는가? 이런 폐해를 막을 길이 있겠는가?
아울러 과연 집에서 ‘인터넷 성찬’을 엄숙한 가운데 행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교회당에서 행하는 예배보다 훨씬 산만하게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행하는 성찬은 더욱 더 그 의미가 반감되지 않겠는가?
또 성찬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해 ‘인터넷 예배’ 중 행하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가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배제될텐데, 그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상과 같이 성례론적 의미에서 보자면, ‘인터넷 성찬’은 매우 부적절하고 심지어 성찬의 의미를 훼손시킬 위험이 농후하다. 그런 것을 지역 교회 목회자나 당회, 개체교회가 임의로 결정하여 ‘강행’한다는 것은 신학적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상황상 성례를 행할 수 없으면, 온전하게 성례를 행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다. ‘성례의 결핍’이 아니라 ‘성례의 모욕’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580).
공예배의 자리에서 온 성도가 함께 성찬을 받는 것만큼 큰 신령한 복과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즐거움은 절제를 통해 누려진다. 성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원리와 질서에 따라 이뤄지는 식사라야, 식탁의 즐거움이 그리스도 앞에서 유효하다. <계속>
우병훈 교수(고신대 신학과)
저서 <기독교 윤리학>, <처음 만나는 루터>, <그리스도의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