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적인 토대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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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칼럼] 뉴잉글랜드 청교도신앙과 현대 복음주의 교회 (6)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1629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베이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청교도 이주자들의 정착촌을 건립한다는 “허락”이 잉글랜드 국왕으로부터 주어졌다. 뉴잉글랜드에서는 매년 주지사와 그의 집행부를 선출하고, 법정에서 지역 통치의 문제들을 다루도록 조치가 내려졌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지만, 더 큰 나라의 정복자들이 세계 도처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대였으므로,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투자를 허락한다는 형식이었다. 펜실베니아의 광활한 토지는 윌리엄 펜이 원주민들에게 토지대금을 주고 구입하는 형식을 취했다.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모인 투자자들은 만일 대법정에서 자신들에게도 이주를 허용한다면,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여기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교회를 구성하던 성도들의 수준과 교양과 재산들을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는 요소들을 점검할 수 있다. 누가 뉴잉글랜드로 건너 올 수 있었느냐?에 관한 부분이다. 아무나 본인들이 원한다고해서,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 갈 수 없던 시대였다. 오직 소수의 “자유로운 시민들과 그들을 돕던 자들”만이 식민지로 이주를 할 수 있었다. 아주 적은 소수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윈트롭(John Winthrop, 1587/88–1649)의 강권에 의해서, 자유로운 시민권이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었다. 새 땅에 도착한 거의 모든 남자들은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서 과거와는 상관없이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오직 교회의 회원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뉴잉글랜드의 시민권이 허용되었다. 교회의 회원심사가 자유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존 윈트롭이 주지사로 시민사회의 정치를 주도할 때에, 그의 성경적인 모델, “언덕위에 도시”는 결코 권세를 가진 어떤 소수의 지배층이 전횡을 하면서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도시 문화가 아니라, 농경사회였고,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해야만 하였기에 이민자들은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여서 상호도움을 주었다. 뉴잉글랜드에서의 초기 정착기에는 한 사람이 무기를 동원하여 남의 땅을 빼앗거나, 넓은 땅을 소유하고 그 안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다스리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을 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더 많은 이민자들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주로 청교도들이 많이 살았던 잉글랜드 에섹스 주에서 함께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룹으로 정착도시를 개척하는 것이 필요했기에 때문이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서로 언약을 맺었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대지들과 그들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도록 하는데 참여했고, 지방 관리들을 선출하는 일에도 동참했다. 식민지에서는 가장이 집안의 가족들을 교육시키도록 의무를 부과했고, 곧 이어서 지역마다 학교를 건설하는 비용을 모금했다. 1636년에 하바드 대학이 최초로 세워졌다.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특징이 강력하게 반영되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교회에 대한 국왕의 강압조치에 반기를 들었다. 주교체제로 통제를 하려고 하면서, 경건한 믿음과 생활을 오히려 억제시키고 있었기에 거부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에서 활약했던 초기 지도자들은 중류층 농업인들과 기술자들이 기꺼이 지역 도시의 공무원들이나 지도자들로 선출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방정부의 권력을 서로 나누어서 사용했던 것이다. 복지국가의 이상과 신앙적으로 축복을 받는 것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제군주에 반감을 가진 인문주의와 개신교회 신앙인들의 꿈이 낭만적으로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잉글랜드를 찾아서 바다를 건너간 초기 개척자들은 제임스 1세의 통치 시대에 신앙의 자유를 꿈꾸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 (William Bradford, 1590-1657)을 따라서 1620년에 ‘메이 플라워’호를 이용했었는데, 정기 여객선이나 상선들도 전무하던 시절에, 집단적인 이주를 감행하기까지 신앙적인 결속력을 유지했었다. 그들은 이미 십 여년 간 네델란드에 건너가서 정착을 꿈꾸던 “분리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630년 3월, 청교도 지도자로서 변호사이던 존 윈트롭은 자신과 함께 잉글랜드 싸우스햄튼을 떠나는 남자들, 여자들, 자녀들에게 뉴잉글랜드에다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설교를 했다. 우리는 이들을 “청교도들”이라고 부르는데, 찰스 1세가 주교정치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하여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경건을 추구하여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적인 개혁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예배의 순결을 더욱 더 진일보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독교인 자선의 모델』 (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윈트롭은 장차 진행될 사회적인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에서 하나의 결속된 사회조직으로서 서로의 약함과 강함을 보완해주고,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행복과 고통을 서로 나누는 사회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을 통해서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갔다. 자신들의 삶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기는 자가 되려고 다짐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지키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실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랑스럽고 복 받은 공동체로서, “언덕위에 도시”(city upon a hill)가 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윈트롭이 앞으로 건설될 뉴잉글랜드 청교도 국가의 청사진을 다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초기 십 여년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지역에서 세워지는 시정부의 건설을 대비해 나갔다. 식민지에 정착하는 동안에, 과연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뉴잉글랜드에 들어오는 개척자들은 영국의 여러 지역에서 왔고, 청교도들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윈트롭은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청교도 왕국출신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일을 치리하던 지방에서 건너왔다. 런던은 영국의 중심부이지만, 다양한 그룹이 살던 곳이라서, 청교도라고 해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다.

1637년에 존 윈트롭이 매사추세츠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어지면서, 일부 과격한 자들과 열정주의자들이 일으키고 있던 분란을 해결해나갔다. 뉴잉글랜드 남부에 살고 있던 “페쿠옽 부족”(the Pequot tribe)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의 상황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결코 보스톤의 성도들은 잉글랜드 곳곳의 교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잊을 수 없었다. 상호 교환된 서신들과 책자들에 이러한 정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1638년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가 “주교전쟁”을 하게 되자,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날마다 개혁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서 나라가 개방되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면밀히 주시하였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의회파를 지지하였고, 1640년대에 벌어진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의 대적들이 패망하기를 금식하면서 간절히 간구했다. 상당수의 열성적인 성도들은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의회파 군대에 가담하여 직접 싸웠다. 목회자들도 다시 잉글랜드로 되돌아가서 교구목회자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회중들로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642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이 모두 열 명이 배출되었는데, 이들 중에서 일곱 명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개혁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되돌아갔다. 이들은 훗날 하버드 대학생들로 성장하게 될 새로운 젊은이들을 (Nathaniel, Samuel, Increse Mather 등) 뉴잉글랜드로 파송하였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초대를 받았다. 존 코튼, 토마스 후커, 존 데븐포트 (John Davenport)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문하는 위치에서만 머물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지도자 로버트 베일리 (Robert Baillie)가 내놓은 강력한 장로교회 정치제도에 대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회중교회를 지지하는 논쟁을 하였다. 이들이 남긴 저서들은 초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교회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논쟁이 가열되면서 회중교회를 지지하는 뉴잉글랜드 지도자들 (John Eliot, Thomas Cobbet, John Norton 등)이 더 가세하였다.

잉글랜드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개최되고 있을 동안에, 1646년부터 1648년 사이에, 뉴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식민지에서 나름대로의 총회를 모아서 기준을 정하는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채택된 신앙고백과 교회운영의 방침을 모아서 펴낸 것이 “케임브리지 정책구상” (The Cambridge Platform)이다. 각각의 개별 교회가 스스로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갖는 회중교회 형태를 지향했지만, 뉴잉글랜드 전체적으로 교회가 “대회” "총회“ (synods, general assemblies) 를 모이는 것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 역할과 위치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자문을 하는 모임으로 설정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인정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명확하게 기준을 설정하기에는 아직도 모호한 문제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은 총회에서 모여서 논의를 한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뉴잉글랜드에서도 마땅한 기준을 정하기 어려워지자, 1658년 런던에서 모인 ”사보이 총회“의 강령들과 신앙기준을 그대로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이래서 사보이 총회를 주도했던 당대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술들이 매우 중요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존 코튼은 찰스 1세를 처형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 의회와 군대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설교를 했다. 크롬웰은 던바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포로들을 모두 다 뉴잉글랜드로 후송하게 하였다. 전쟁에 나왔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일손이 부족하던 신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크롬웰은 또한 존 코튼에게 자문을 구했다. 코튼은 윌리엄 후크와 존 데이븐포트를 잉글랜드로 보내서 청교도 군대의 군목으로 활약하면서 “호국경” 크롬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크롬웰이 질병에 걸려서 사망하게 되면서, 뉴잉글랜드에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사실상 청교도의 꿈이 무너지고 말았다. 절대군주의 시대에 모든 권력은 왕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유난히 전통주의에 젖어있던 잉글랜드 사람들은 또 다시 스튜어트 왕가를 의지하고자 했다. 찰스 1세의 아들로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가 다시 왕정에 복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도, 살아남아야할 방법을 추구해야 될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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