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찬’ 가능성 열면, ‘인터넷 세례’까지 열리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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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 (下)

최근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예배’가 ‘뉴 노멀’로 자리잡으면서 ‘온라인 예배’를 넘어 ‘인터넷 성찬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우병훈 교수님(고신대)의 ‘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를 9월 20일에 이어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찬식의 한 장면. ⓒUnsplash
▲성찬식의 한 장면. ⓒUnsplash

초대교회 역사, 성찬 교제성 강조해
교제 못한다면 성찬 않는 것 바람직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으로, 준비를
상황에 이끌려 성찬 방식 결정 안돼
사적 성찬 거행은 하지 않도록 해야
공예배에서, 모든 성도 함께 누려야

4. 교회사적 근거

4.1. 초대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이다.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로, 초대교회 성찬은 교제의 의미가 강했다.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성찬의 세 번째 요소는 다시 돌아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이다.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4.2.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는 가히 성찬론의 대토론 시대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빵과 포도주가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루터는 공재설(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공존한다), 츠빙글리는 상징설(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칼뱅은 영적 임재설(그리스도는 성찬상에 영적이지만 사실상 임재한다)을 주장했다.

첫째로, 당시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은 ‘화체설(化體設)’이었다. 떡과 포도주가 정말로(realiter)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사제들은 결코 떡과 포도주가 땅에 떨어져 주님의 몸과 피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떡은 웨이퍼(얇은 과자) 모양으로 만들어 성도들의 입 안에 넣어줘서, 한 조각이라도 흘리는 일이 없게 했다. 포도주는 더욱 흘리기 쉬우니, 사제들만 먹음으로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일이 없게 했다.

남은 빵은 다음 미사를 위해 보관하고, 포도주는 집전 신부가 다 먹어 소실됨이 없게 했다. 특히 포도주를 일반 성도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은 화체설에 근거한 잘못된 관습이었다.

로마 가톨릭 트렌트 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교리화하였다. 그들은 떡과 포도주 어느 하나만 받으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함께 수여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콘코미탄티아(concomitantia)’ 교리를 천명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성찬 교리는 교회의 위계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둘째로,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성찬의 아래에(sub) 함께(cum) 안에(in) 공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공재설(共在設)’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을 비판한다.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일반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오직 사제들만 마시는 관습을 ‘포로 상태’로 표현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제사장이므로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다 받을 수 있다는 루터의 사상은 이후에 ‘만인제사장직 교리’로 발전한다.

하지만 루터의 성찬론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함께 하는 성찬’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모든 성도들이 누리고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임재는 말씀과 성례가 연결될 때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 식의 라틴어 미사를 없애고, 각 나라 말로 설교와 성례를 집행하도록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셋째로, 츠빙글리는 ‘상징설’ 혹은 ‘기념설’을 주장하여 화체설과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가졌다.

츠빙글리에 따르면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며,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일 뿐이다. 츠빙글리는 당시 존재하던 물질주의적 경향을 매우 싫어했다.

로마 가톨릭은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에다 은혜를 섞어버렸다. 그리고 점점 빵과 포도주 자체를 숭상하는 우상숭배의 죄,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동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화 시키는 현상을 츠빙글리는 극도로 혐오했다.

츠빙글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따라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빵과 포도주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영’이며,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넷째로, 칼뱅은 성찬상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영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사실상의 임재(virtual presence 혹은 genuine presence)’를 주장한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칼뱅도 역시 ‘말씀과 신앙’이 ‘성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신앙 없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해 계실 리 없다고 보았다.

특히 칼뱅의 성찬론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강조되는데, 우리가 마음을 드높여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상향운동’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하향운동’을 모두 강조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이 종교개혁 시대의 성찬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성찬 논의를 불필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성찬론을 가지고 그토록 열불을 내며 다퉜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의 성찬 이해와 경험이 너무나 일천해서 생긴 현상일 수 있다.

▲ⓒpixabay
▲ⓒpixabay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찬론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했다.

첫째, 성찬론은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주님의 ‘만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고 마시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찬을 잘못 시행하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행위이지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니다.

둘째, 성찬론은 교회와 구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성찬론을 통하여 사제중심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구원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찬론을 통하여 사제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구원론을 확립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제중심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목사와 평신도 사이의 역할적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배우는 교회(ecclesia discens)’로 나누었다. ‘가르치는 교회’란 교황과 주교로 이뤄진 집단으로서, ‘교도권(magisterium)’을 가진다. 반면 ‘배우는 교회’란 ‘가르치는 교회’ 하위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인데, 교회의 진리를 수납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사제들조차 주교들의 권위 하에 있으므로 평신도들과 더불어 ‘배우는 교회’에 속한다.

개신교회는 이상과 같은 로마 가톨릭의 구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목회자와 평교인의 구분을 완전히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회는 ‘집합적 교회(ecclesia collectiva)’와 ‘대표적 교회(ecclesia repraesentativa)’의 구분이 있었다. 전자는 전체 신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후자는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목회자들을 뜻한다.

개신교회가 ‘집합적 교회’와 ‘대표적 교회’ 사이의 위계질서를 로마 교회처럼 부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목회자와 평교인의 역할적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무질서한 교회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성경적 균형이 교회의 본질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기독론),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시며(구원론), 그분의 몸이 된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한 교리이다(교회론). 그래서 중요하고, 그래서 16세기 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두고 엄청난 논쟁을 벌였다.

4.3. 종교개혁 이후 시대

종교개혁 이후 시대는 성찬에 대해 또 다른 토론들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사적(私的) 성찬’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적 성찬’이란 공예배 중에 성찬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자리에서 성찬을 받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의견이 나눠졌다. 몇몇 신학자들은 성찬이 ‘매우 특별한 경우에, 다른 성도들의 입회 아래’ 병자들의 집에서 병자들에게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건이 중요하다. ‘매우 특별한 경우’란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앞으로의 삶 가운데 도무지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경우를 뜻한다. 또한 ‘다른 성도들의 입회 아래’란 장로를 반드시 포함하고, 그 병자를 아는 신자들이 반드시 거기에 참석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적인 성찬이 미신에 빠지거나 남용되는 경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신학자들은 성찬이 ‘공예배(cultus publicus; public worship)’의 일부로서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일치한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성찬이 사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찬이 공예배 현장이 아닌, 개인의 집에서 시행되는 것을 분명히 반대했다.

그들에게 성찬은 본질적으로 만찬(deipnon), 함께 모임(sunaxis), 잔치(convivium)이며, 그리스도와의 교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의 교제도 되기 때문이었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688-689).

이 점에 있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9장 4절에서도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다음과 같은 행동은 이 성례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제정과는 위배된다. 즉 사적 미사 곧 이 성례를 사제나 다른 이로부터 홀로 받는 일이며, 잔을 백성에게 주지 않는 일, 떡과 포도주를 숭배하는 일, 숭배를 목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거나 행진을 하는 일, 다른 유사 종교적 용도를 위하여 보관하는 일 등이다.”

따라서 사적으로 성찬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쪽에 더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동의한다. 사적 성찬을 허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 장로와 성도들의 입회 하에 시행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가르쳤다.

4.4. 종교개혁기 이후에 정립된 교회의 직분론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직분론이다. 여러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감독교회의 폐단을 극복하고, 평교인들에게 장로직과 집사직 및 그에 따르는 사역들을 돌려주었다. 그것은 성경적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목사와 치리 장로와 집사의 임무는 구분되어 있다. 여러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목사의 직무는 ‘기도, 설교, 성찬 집례, 축도, 찬송 지도, 교리 교육, 심방, 가난한 자들을 돌봄, 교회의 규율을 보존하는 일, 교회의 회원(member)을 관리하는 일 등등’이다.

치리 장로의 직무는 ‘성도의 삶을 살피는 일, 교회의 질서를 보존하는 일, 말씀으로 성도들을 지도하는 일, 연약한 자를 심방하고 위로하는 일, 집사들을 돕고 지도하는 일, 목사에게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함께 논의하는 일,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는 일 등등’이다.

집사의 직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 교회의 헌물을 관리하는 일, 교회의 식탁과 제반 봉사를 돌보는 일 등등’이다. (여러 교회에 있는 권사직의 직무는 장로와 집사의 직무가 적절하게 섞여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례가 목사의 고유한 직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례 집례를 개별 신자에게 맡기는 것은 목사의 직무를 무질서하게 다루는 일이 된다.

4.5.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인터넷 성찬’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종합하여 ‘인터넷 성찬’을 평가한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초대교회 역사가 가르쳐 주듯, 성찬은 교제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인터넷 예배’와 같이 온 성도들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교제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성찬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초대교회 역사가 가르쳐 주듯, 성찬은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인터넷 성찬’에서는 부득이하게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과 교회의 하나 됨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켜 버린다.

셋째, 종교개혁기 교회사가 가르쳐 주듯, 성찬에 대한 신학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상황에 이끌려 성찬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 교회에 대한 생각, 구원에 대한 관점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성찬’이 성도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줄 지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넷째, 종교개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듯, 성찬은 말씀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각 개인이 집에서 거행하는 ‘인터넷 성찬’은, 말씀의 집례자가 성찬을 직접 집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말씀과 함께’라는 요소를 약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목사직의 고유한 책무를 평교인들에게 이임(移任)함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훼손할 수 있다.

다섯째,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에서 배우는 지혜에 따라, 사적 성찬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곧 죽어가는 병자와 같이 정말 사적 성찬이 필요한 경우라면, 장로와 성도들의 입회 하에서만 성찬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찬을 받는 성도도 지금 내가 받는 이 성찬이 공예배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누린 그 은혜를 전해 주는 성찬임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가운데 한 교회에서 개인별 포도주와 빵을 준비한 모습. ⓒ크투 DB
▲코로나19 사태 가운데 한 교회에서 개인별 포도주와 빵을 준비한 모습. ⓒ크투 DB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도입이 아닌
주인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 하나님의 긍휼 기다려야 해
다음으로 미루는 것 바람직, 주리게 하실 때에는 주리자

 

5. 결론: 성찬의 주인께서 다시 식탁을 차려주실 때까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와 말씀의 긴밀한 연결성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요한복음 강해』[Tract. Ev. Jo.], 80.3).

“말씀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물은 다만 물일 따름이다.

요소에 말씀을 더하라. 그리하면 요소는 성례가 된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성경적 근거가 있을 때, 생명이 되고 경건이 된다. 성경적 근거 없이 행하는 행위는 단지 종교적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원리와 건전한 신학적 근거가 없는 성찬은 일반적인 빵과 포도주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아니,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성찬을 행하는 것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될 것이다(고전 11:17).

필자는 ‘인터넷 성찬’은 코로나19가 교회에 끼치는 ‘미끄러운 경사(slippery slope) 현상’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미끄러운 경사 현상’이란 하나의 변화가 연쇄적으로 다른 변화를 일으켜, 결국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현상을 말한다.

교회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인터넷 예배’를 허용했다 해서, ‘인터넷 성찬’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씩 ‘인터넷 화(化)’시키면, 교회는 화(禍)를 자초하는 셈이 된다.

‘성경’이 알려주는 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새 언약의 식사이며,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성도들이 공예배로 모인 현장에서 말씀을 맡은 목사에 의해 집례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인터넷 성찬’은 성경적 원리에 맞지 않다.

‘성례론’의 원리로 보더라도, ‘인터넷 성찬’은 득(得)보다 실(失)이 크다. ‘인터넷 성찬’이 가져올 병폐들과 부작용들에 대해, 교회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성찬’을 열어두면, ‘인터넷 세례’에 대한 질문도 나올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인터넷 성찬’ 개념이 부적절함을 알게 된다. 성찬은 공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떡과 잔에서 함께 누리는 잔치인데,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행하는 ‘인터넷 성찬’은 그런 의미를 없애버린다. 그것은 목회자의 직무를 훼손하는 것이며, 성찬이 지닌 기독론적, 구원론적, 교회론적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게 만든다.

이처럼 성경과 성찬론과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인터넷 성찬’은 온당치 못하다. 성찬의 풍성한 의미를 축소시키고 왜곡시키는 ‘인터넷 성찬’을 굳이 하려는 이유는 정말 성찬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목회자의 공명심(나의 목회는 이 정도로 앞서 나간다)에 근거해 그런 것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상황에서도 성찬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반드시 시행하고 싶다면, 목사와 장로들과 몇몇 성도들이 각 가정에 방문하여 다니면서 예배를 집례하고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교회사가 알려주는 지혜이다.

전염병의 위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성도들에게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성찬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고 ‘인터넷 성찬’을 강행하는 것은 편의주의적 발상에 근거하여 성찬의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도입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인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지금은 스스로 부족한 식탁을 차려먹는 민첩함이 아니라, 주인이 차려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기다려야 했다면(고전 11:33), 함께 모이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모일 수 있을 때까지 마땅히 더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시점에서 교회는 힘들지만, 어렵지만, 오히려 결핍과 주림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 주리게 하실 때에는 주려야지만, 주린 자가 누리는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식사 중에 가장 ‘품위와 질서’를 갖춰서 해야 하는 식사가 바로 성찬이기 때문이다(고전 14:40 참조).

‘인터넷 성찬’을 시행하고자 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있다면, 이상과 같은 내용을 꼭 고려해 보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우병훈 교수.
▲우병훈 교수.

우병훈 교수(고신대 신학과)
저서 <기독교 윤리학>, <처음 만나는 루터>, <그리스도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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