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세상의 문제들 9: 소문과 진실 사이, 리스너와 스피커
1. 사람은 말로 창조되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Speaking, 말입니다. 그러니 듣는 것은 숙명입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비선택적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이야기’에 목말라 합니다.
2. 듣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세상은 언제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Speaker(스피커)와 Listener(리스너)가 공존하는 세상,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
3. 옛날 옛적 마을 빨래터에 들리는 방망이질. 그러나 방망이질을 멈추게 하는 소리는 그곳에 모인 마을 여성들의 속닥거림입니다.
“옆집 순실이네 집에 도둑이 들었대.”
“개똥이가 순실이랑 사귄다네.”
요즘 시대라고 다를까요. 빨래터 대신 타이핑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만드는 자와, 무슨 이야기가 올라왔나 듣는 자.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이야기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4.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비선택적 이야기와 선택적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들은 그 무언가를 계속해서 전달하는 스피커가 되는 사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마저 임금님이 당나귀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야기를 변질시키는가. 그리고 왜 이야기는 변질되는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 내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나는 오늘 누구와 이야기하는가.
이 문제들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5. 왜 사람이 만든 이야기는 원본 그대로 보존되지 못할까요?
첫째로 기억의 한계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단위를 7가지 이상 기억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 이상의 숫자를 기억하는 방법은 청크, 의미 기억화시켜 단위로 묶어야 합니다. 그냥, 기억의 한계입니다.
모든 사건에서 사람은 의미를 기억하려 해야 합니다. 사건의 단상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입력과 저장 인출의 세 가지 단계에서 불필요한 기억은 뇌에서 자동 삭제하거나 감당하지 못할 기억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곳으로 밀어냅니다. 남겨둘 것은 폴더를 만들어서 따로 분류하지요.
아주 맑은 날,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맑은 날 폴더에, 어떤 사람은 카페 폴더에, 어떤 사람은 사람 폴더에 넣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날이 맑은 날이 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은 카페에 자주 가려 하고, 어떤 사람은 우연한 만남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CCTV를 돌렸을 때, 자기 기억이 100% 완전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기억은 조각난 형태로 폴더에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입력할 때의 시점보다 인출할 때의 감정에 의존해서 꺼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그대로 기억할 리가 없지요.
둘째로, 사람들이 인출해서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는 결국 자기중심적 기억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기억 왜곡을 가져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면, 내가 열심히 했다는 기억만 떠올려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분명히 옆에서 도와주신 많은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얼마나 말을 안들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주인공이 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자서전적 기억입니다.
6. 이야기에는 그래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실입니다. Fact입니다. 눈으로 보고 들은 진짜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사실을 뛰어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소문입니다. 진실도 사실도 아닌, 그저 자신이 들은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전달하다 변질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진리마저 가리워, 결국 이 세상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에게는 진리가 눈 앞에 있습니다. “진실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주님은 베드로의 앞날을 말씀해주시고 계세요. 시간을 초월해 그 이야기는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피커로 이야기를 전하며, ‘진실’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3절)”.
진리 앞에 선 리스너 베드로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진리마저 자기중심적 사고, 즉 ‘내가 왜 저 사람이 신경쓰이는가?’ 라는 무의식적 사고를 변호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을 전달하는 스피커가 됩니다.
결국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요한이 살아있음도 자기중심적 해석에 의한 살아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우고 맙니다.
요한복음 21장의 핵심을 이루는 사랑의 이야기가, 변질된 시기질투의 이야기로 왜곡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매주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왜 변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어떤 진리앞에서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엉뚱한 스피커가 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8. 사람들은 어느덧 수많은 정보를 듣는 리스너가 되었습니다.
정보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취합하고 지식인이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사랑 없음’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사랑없음으로 진리를 갈구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정보를 자기중심적으로 취합하여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피커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여전히 여기 이 자리에 있는지, 나는 여전히 왜 저기 있는 요한이 그냥 서 있음에도 신경 쓰이는지, 마치 베드로가 수많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 이야기를 왜곡되게 전달했던 것처럼 돌아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들리는 수많은 진리를 가리는 스피킹에 속아버릴 것입니다.
9. 세상의 문제…. 여러분 정보가 무서운 시대입니다.
정보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가 편향적 정보에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자극적인 것에 끌립니다.
그러니, 많은 정보가 비선택적으로 들리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교묘한 시대가 되어 위험에 봉착했습니다.
내 정치적 스탠스를 굳히기 위한 선택적 정보 탐색과 취합으로 이어지는 현상도 많지만, 교리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한 선택적 신앙 생활과 성경공부도 많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요한복음 21장, 물고기떼와 함께 고기낚는 동료들이 어우러진 현장에서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만도 너무나 끔찍한데, 이제는 정보를 통해 물질에 대한 만족이 우선으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스피커가 된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내 자신을 보는 것도 끔찍한데, 이제 온갖 정보들의 흐름으로 우리를 마치 사랑하는 사람인 척 하지만 그 사람을 나만 소유하고 싶어 갈등을 조장하는 스피커가 되었다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나 혼자만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마저 내가 변화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 음성 나만 들었을 테니 하고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켜 전달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의 갈등을 부추기는 말을 일삼는 스피커가 된 것….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10. 유튜브에서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하는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아프답니다. 아니 어쩌면 저렇게 웃으면서 다른 목사님을 욕할 수 있을까.
누가봐도 그 목사님의 실명을 제목에 거명하고 태그까지 걸면서 자기 자신을 알리고자 함이 보이는데, 내용은 ‘예수님 말씀이 이랬대. 하나님 말씀이 이랬대. 그러니 저 사람은 가짜야.’ 이것이 전부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음이 아니라 “저 사람 싫어”입니다.
11. 스피커와 리스너. 우리 둘 다 이 자리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리스너 여러분,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혹시 그 정보가 여러분을 여전히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 자리에는 여전히 물질과 학력, 인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속삭임들만 가득한 자리는 아닙니까? 일단 벗어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정보만 듣는 곳에서는 앞으로도 혼자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보를 취합해 나는 왜 여전히 디베랴에서 물고기를 잡는지, 그 현상을 설명하고 타인에게 이해시키며 늙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스피커 여러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 이야기가 여러분과 당사자만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잊지 마세요. ‘예수님과 나만 알아’ 라고 했던 베드로의 생각이 왜곡된 소문을 만들었지만, 그 모든 것을 성령께서는 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음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자기 중심을 빼고,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에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전한 어떤 이야기도 결국 타인을 나의 소유로 삼고 싶은 욕심이요, 그 욕심은 여러분 자신과 대상마저도 타락시킬 이야기임을 잊지 마십시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