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생명윤리
건실한 가정윤리 강조, 생명 인위 제거는 범죄
영아 유기나 낙태뿐 아니라 산아 제한도 반대
당대 난잡한 동성애나 성행위도, 분명히 반대
버려진 아이들 양육하고, 격투기와 전쟁 반대
시작하면서
낙태(落胎) 문제는 우리 시대 심각한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에서 낙태죄를 명시하고 있는데,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합헌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7:2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개정을 권고했다.
이때까지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으면 낙태죄 관련 조항은 2021년 1월 1일부로 효력을 상실하고 자동 폐기된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임신 14주, 헌법 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22주를 인공 임신중절 가능 기간으로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10월 7일, 낙태죄 자체는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14주까지 낙태 허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아도 인간 생명이라는 의학적 견지에서 볼 때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 정책위원회는 주수(週數)에 따른 인공 임신중절 허용이 아닌 낙태죄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또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도 낙태는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완전 허용을 요구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낙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살인 행위라는 점에서 이를 반대하고 낙태죄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상호 대립적 가치를 놓고 찬반 논란이 거제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낙태죄는 현재 한국 사회의 심각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낙태 혹은 낙태죄에 대한 의학적 혹은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낙태가 허용되던 헬라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는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 점에 대한 역사적 사례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1. 낙태하는 사회
낙태는 헬라 로마 사회에서는 법적 규제 없이 자행되던 일상사였다. 이 시기 낙태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들보다 부유한 계층이 더욱 빈번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낙태를 통한 가족계획을 권장한 바 있는데, 이런 전통은 그 이후 헬라 로마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로마의 법은 태아를 인간(a human being)으로 보지 않고 내장(內臟)의 물질(material viscera)로 간주했다.
그래서 낙태는 상당한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규제되지 않는 낙태는 결과적으로 성적 무질서와 출산율을 크게 저하시켰는데, 이 낙태가 로마 사회 인구 감소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낙태 방법은 다양했는데, 가장 흔한 방법은 치사량에 약간 밑도는 독약을 복용하여 유산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또 태아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독극물을 자궁내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어, 태아와 산모 양자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망한 태아를 산모의 체외로 제거하지 못해 산모와 태아가 동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 다른 낙태법은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긴 바늘과 갈고리 혹은 칼을 동원하여 태아를 토막 내 자궁을 통해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낙태법이 산모에게도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 낙태가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낙태가 행해졌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불륜에 의한 성행위 은폐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 경제적 이유나 재산 상속에 있어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여러 후손들과 공유하기를 원치 않았고, 가난한 이들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기에 낙태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경우 낙태를 원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가장인 남성이었다. 로마법은 가장인 남성(paterfamilias)이 집안 여성에게 낙태를 명할 권리를 포함한 집안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권리를 파트리아 프로테스타스(patria protestas)라고 부른다. 사실상 가장인 아버지는 노예나 부인이나 자식을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거나 물건이나 소유물처럼 판매할 수 있었다.
일례로 도미티안(Domitian) 황제는 조카 줄리아(Julia)를 강간하여 임신하게 했는데 줄리아게 낙태를 명했고, 낙태 중 사망했다. 남편에게 신생아의 유기를 명할 권한을 허용한 사회에서, 아내나 정부(情婦)의 낙태를 명할 권리가 남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못 된다.
이런 이유 외에도 부유한 여성들은 성적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낙태를 선택했다. 우리 사회와 큰 차이가 없다.
초기 기독교가 낙태를 반대했던 3가지 이유
1. 태아도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생명이라는 점
2.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점
3. 낙태 행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점
2. 초기 기독교회의 대응
이런 시대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영아 살해는 물론이지만, 낙태는 명백한 살인으로 보아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특히 3가지 관점에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로 태아도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생명이라는 점(시 139:13-16), 둘째로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점, 셋째, 낙태 행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회는 인위적 생명 제거 행위를 거부했다.
초기 기독교 문헌 중 낙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대표적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 두 가지 문서가 디다케(Διδαχή, Didache)와 바나바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이다.
디다케는 흔히 ‘열두 사도가 이방인에게 전한 주의 가르침’ 혹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octrina Duodecim Apostolorum)’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도덕규범을 ‘두 길(Two ways)’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길’이란 생명의 길(the way of life or light)과 사망의 길(the way of death or darkness)을 의미하는데, 이 두 길이라는 상호 대조 개념은 그 이후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생명의 길’을 말하는 디다케 제2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살인하지 말라. 그대는 간음하지 말라. 그대는 소년을 탐하지 말라. 그대는 음행을 피하라. 그대는 도적질하지 말라. 그대는 주술 행위를 하지 말라. 그대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고, 영아도 죽이지 말라. 그대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바나바 서신 또한 디다케와 같은 방식으로 두 길을 제시하는데, 디다케보다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아타나시우스는, 디다케는 초신자나 세례 준비자들을 위한 훈련 교범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거부를 가르쳐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디다케와 바나바 서신에서 말하는 ‘사망의 길’은 영아 살인과 하나님 솜씨(workmanship of God)의 파괴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 2세기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마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청원’ 35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낙태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여성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낙태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궁 속의 태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대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신생아를 유기하지 않습니다. 신생아를 내다버리는 이들은 유아 살해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낙태나 영아 유기를 죄악시했고, 이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이런 행위를 일삼는 이교도를 비판했다. 2세기 말 미니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자신의 ‘변증서(Octaviu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은 한때 태어난 자식들을 들짐승과 새들에게 유기했으며 아이들을 목을 조르거나 내던져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당신들 중 어떤 여성은 약물을 마심으로써 복중에 있는 후일의 인간의 근원을 멸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출산 전 존속 살해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당신들의 신들(gods)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사트루누스(Saturn)는 그의 자식들을 유기한 것이 아니라 잡아먹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유아를 희생 재물로 바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낙태와 유아 유기를 금지했다.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인드로 몬타넬리(Indtro Montanelli)는 이렇게 썼다.
“낙태와 유아 살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사회 풍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고 기독교 교리에 따라 교육하도록 당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기독교회가 보여준 생명 존중사상이자 생명 윤리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출산율은 이교 사회보다 상대적으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미니키우스 펠릭스는 자신의 변증서에서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며 그것은 “우리의 건실한 생활양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혼인을 신성시했을 뿐 아니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으로(시 127:3) 이해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성행위는 일차적으로 자녀출산을 위한 것이었고, 출산과 육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는 생명 존중 사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낙태 반대와 그 가르침은 그 이후 시기까지 변함없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이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같은 4세기 교부들도 낙태를 정죄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 어거스틴 만큼 강하게 반대하고 어거스틴의 가르침만큼 비중 있게 영향을 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결혼과 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녀 출산이라고 보았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를 반대했다.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3. 종합과 정리
정리하면, 초기 기독교는 영아 유기나 낙태뿐 아니라 산아 제한도 반대했다. 구약에서 오난의 체외 사정이 정죄되었듯(창 38:8-10),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산아 제한은 부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교부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이 고안한 정자를 헛되이 사정하면 안 되고 파괴하거나 허비해서도 안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스토아 학파의 경우처럼 결혼에서의 성생활을 오직 출산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대적 전통을 따라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의무와 즐거움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를 보여 주었는데, 결혼 주된 목적, 그리고 성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출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편만한 낙태 관행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연하면, 기독교 공동체는 동성애(롬1:26), 항문성교, 구강섹스 등 당시 난잡한 동성애나 성행위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이런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에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바나바 서신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너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처럼 더러움을 위하여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남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의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부정한 여인과 연합하지 말라(바나바 서신, 10).”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독교는 그 시대의 풍조에 맞서 영아 유기나 살해, 낙태, 동성애 등을 반대하면서 건실한 가정윤리를 강조하였고, 유아나 영아,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인간 생명의 인위적 제거는 범죄라는 점을 가르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생명윤리였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검투사들의 격투기를 반대한 것이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pacifism)를 지행한 것도 생명 윤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상규 박사(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