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 마틴 루터 킹, 조지 부시
모범적으로 살다 가신 훌륭한 사람의 실제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나의 인생을 고양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일이 될 것이다.
몇 사람을 살펴보자. 어떤 점에서 “10리를 간 사람들(Extra Mile Pathway, 마 5:40-42)”을 찾아보는 것이다.
①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미국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네덜란드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청소년 시절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전진에 전진을 하며 승승장구했다.
사립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변호사가 된 그는 정계에 진출한 뒤에도 탄탄대로를 걸어, 38세에 이미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인생의 깜깜한 터널이 있었다.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패배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억수처럼 쏟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1년도 못 되어 소아마비에 감염되어 걷지도 못하는 중증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루즈벨트는 주저앉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은 잠시 접어두고, 소아마비 투병 승리라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7년간 소아마비라는 중증장애와 싸우다가 정계로 복귀한 후 루즈벨트는 1928년 뉴욕주지사로 당선되었고, 4년 뒤에는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4선 대통령이다. 미국을 경제 대공황에서 구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을 인정받아서였다.
그런데 4선에 성공한지 3개월 만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타계한 장소는 백악관도 아니고 자택도 아닌, 웸 스프링스 재활센터였다. 이곳은 그가 소아마비에 걸렸을 때 사재를 털어 창설한 미국 최초의 재활병원이었다.
정계에 복귀하기 전 7년 동안 루즈벨트는 그곳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으며 정계에 복귀한 후에는 ‘작은 백악관’이라 하여 자주 그곳에 들러 직무를 수행했다.
특히 매년 추수감사절을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그에게는 그곳이 소아마비를 정복하는 꿈을 품은 장소였기에 더 특별했을 것이다.
②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그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자이자 사상가요, 신앙인이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통해 인류화합을 도모한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사상가로 몸소 사랑의 실천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가 흑인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버스 보이콧 운동의 대표로 선출되면서부터다. 이는 흑백분리법의 일환으로 버스 안에 백인과 흑인 좌석이 구별돼 있었던 것을 철폐하고자, 11개월 동안 흑인들이 보이콧을 벌인 사건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명받은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 무저항주의 사상을 군중에게 호소함으로써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 이후 그는 인종화합을 위한 민권운동으로 30여 차례나 체포되었지만,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흑인사회의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고 백인 주류세력으로부터 소외당했으나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암살당할 때까지 몸소 실천했다.
③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성경 본문과 함께 간단한 설교문이 있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묵상집을 읽는다.
그 후 집무실로 내려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한다. 매일같이 기도-성경 읽기-보고서 읽기의 순으로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결재를 할 때도 늘 먼저 기도부터 한다. 때문에 백악관 안에서 대통령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또한 백악관 안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한 것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지만, 케네디 대통령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부시 대통령 임기 중에 다시 활성화되었다. 자유 진보 언론들이 이를 문제 삼자 “대통령이 된 후에 없던 것을 시작했다면 모르겠지만, 정계 진출 전부터 오랫동안 해오던 일인데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개인적 라이프 스타일을 꼭 바꿔야 하겠느냐”며 진솔하게 대답해서 여론을 잠재우기도 했다.
그는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직원들에게 “이 성경공부가 주일예배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성공회 신부가 있었던 가문에서 태어나 비교적 자유 진보적인 신앙을 가졌다가, 가족 별장을 방문해온 빌리 그래함 목사의 도움으로 깊은 신앙인이 되었다고 한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