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종교개혁 기념강좌 (5)
3.2. 흑사병 이후로 종교개혁을 철저히 추진하다
츠빙글리의 흑사병 체험은 그저 한 사람 개인의 변화를 넘어서서, 확고한 종교개혁의 추진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일련의 흐름을 제공했다. 츠빙글리는 흑사병에 감염된 환자들을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다. 그의 아들 학교에 관련한 일로 온천이 있던 도시를 방문하고 있던 중에, 츠빙글리는 스위스 전역에 흑사병이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황급히 취리히 시로 돌아가서 흑사병에 감염된 성도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귀족들과 부유층들은 오히려 도시를 빠져나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예외적으로 목회 사역지였던 취리히 시로 신속히 돌아갔다. 도시에 남아있던 성도들은 가난한 자들이라서 피신을 염두에 둘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그의 흑사병 이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흑사병 이후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를 반대하던 자들은 소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몇 차례 중요한 대토론회를 통해서 도시 지도자들에게 성경 전문가로서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츠빙글리가 흑사병의 두려움을 뚫고 “목회자의 임무”를 감당하려했던 내용들은 『목자』라는 설교 속에 체계화된 내용으로 담겨져 있다. 그는 목회자의 목회 윤리와 실천적인 태도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1523년 10월 28일 주교회의에서 행한 설교를 확장하여, 1524에 출판하였다. 츠빙글리는 부패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과 주교들에게서 벗어나서, 개혁된 교회의 “목회자”라는 직책을 역설하였다. 교회의 개혁을 염원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는 일에 기뻐하면서,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이 되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라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수많은 교회법 규정들을 만들어내는 교황의 교서에 대해서 철저히 반격하였다. 그러한 규정들에 근거하여 성도들을 처벌하고, 벌금을 가하는 것들이 모두 다 왜곡된 것임을 드러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규정이었다.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오만한 권력남용이었다.
1522년에 츠빙글리는 성인숭배, 금식, 마리아 경배를 포함해서 가톨릭의 모든 전통적인 관습들을 철저히 비판했다. 때로는 시의회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으며, 가톨릭에 속한 반대파들로 인해서 정치적 불안이 조성되었다. 1523년 1월, 제1차 취리히 논쟁에는 츠빙글리측과 반대파들 사이에 대규모 공개토론이 개최되었는데, 시의회원들과 6백여 명의 참석자들이 종교적인 관례들을 놓고서 긴장된 논쟁을 폈다. 츠빙글리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성경을 인용하면서 개혁의 안목을 탁월하게 제시했다. “67개 조항”으로 구성한 교회 개혁의 원리가 채택되었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최고의 권위로 주장하는 교황권은 적그리스도이며,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의 허구성을 밝혔다. 교황도 초대교부들처럼 여전히 많은 모순과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주교회의가 모든 것의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폐지하게 되었다. 또한 성직자들에게 부과되어오던 로마 가톨릭의 독신주의를 폐지하고, 합당한 결혼생활을 허용하였다. 로마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가 우위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중요한 기준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모든 토론에서 성경에 따라서만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종교개혁의 추진력이 과연 츠빙글리의 생애 중에서 어떤 계기로부터, 어떻게 다져졌는가를 다시금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3.3. 하나님의 주권사상
흑사병 체험에서 정립된 하나님의 주권사상 (sovereignty of God)이 츠빙글리의 모든 신학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로 광범위하게 작동하였다. 츠빙글리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해서』 (De vera et falsa religione Commentarius, 1525)을 펴냈고, 하나님의 섭리사상을 매우 높이 다루면서, 『섭리론』 (De Providentia, 1530)을 저술하였다. 가장 주된 저서로 평가받고 있는 저서들에서 츠빙글리의 관점은 분명히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명백한 차이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인식이 그의 신학사상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요 구원자이기에 인간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의 근원으로서, 다른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또한 최고의 선인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고통스러운 겨울을 보내고 난 후, 1520년 봄에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고난의 시기를 겪으면서, 츠빙글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을 ‘그릇’이라고 비유하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섭리적 (providential)이라는 사실이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체험에 기초하여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와 보호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죄악됨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은 신뢰를 받으실 분이시다.
만일 불행과 질병이 닥친다면, 마치 열쇠 수리공이 낡은 도구를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낮추시고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라.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 당신을 다시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분의 뜻에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복종시켜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고요함과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훨씬 더
누리게 될 것이다.
츠빙글리의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사상은 하나님 절대주권과 섭리론인데, 그가 체험한 고난은 흑사병이라는 죽음에서의 체험이 반영되어져 있다. 그는 처절한 개인적인 체험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목회적인 방침을 결정짓는 귀한 재료로 활용하게 되었다. 역경에서 빚어진 열매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서만 성장하고 성숙되어진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흑사병에서 살아난 후,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진정한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츠빙글리의 강조는 교과서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강력하게 체험한 실존적인 것이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섭리에 대해서 인간이 완전히 의존해야함을 자신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분석하자면 츠빙글리의 하나님 주권사상은 섭리에 대한 교리적인 설명 속에서 구체화되어졌다. 또한 츠빙글리는 헤쎈의 제후 필립과 귀족들에게 행한 그의 유명한 설교 “섭리에 관하여”(De provientia, 1530))를 통해서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설교는 다음 해 일곱 장으로 구성된 논문으로 확장되어서 출판되었다.
츠빙글리가 관심을 갖고 자주 거론했던 사상은 한 개인의 구원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무능함이 대조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생각은 그 반대로 이끌어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헛된 욕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츠빙글리는 지적한다. 그러한 욕망을 버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인 상태를 깨닫게 된다.
츠빙글리는 공적으로 행하는 설교, 수많은 저작들, 광범위한 서신교류 등을 통해서 유럽의 종교개혁 진행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는 성상을 제거하고, 미사를 거부하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전통적인 로마 교회와의 단절이 강화되었다. 츠빙글리의 영향력은 유럽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는데, 그는 더 이상 교황의 권위와 상하구조의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하는 구원,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과 말씀의 중요성,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성례, 분파주의를 거부하는 교회론, 국가와 세속군주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 등 개혁교회의 지침을 체계적으로 남겼다. 츠빙글리의 영향은 영국과 스코틀랜드까지 확산되었으며, 틴데일, 라티머, 커버데일 등에게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