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NEW 노아의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4)
야벳 아들 마곡, 세계 최초 기마민족 스키타이의 조상?
일부의 ‘가야 기독교 국가설’은 이제 조용히 접었으면…
한일 관계에 얽힌,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적 섭리 있나?
기독교와 역사해석
모든 종교는 역사성을 가진다. 따라서 기독교도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다만 기독교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역사관을 갖는다.
즉 다른 종교가 자연과 신비적이거나 합리적인 경험 속에서 신적 계시(로날드 내쉬, <기독교신앙과 역사이해>, 13쪽)를 찾으려 하는 반면,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한 창조와 타락과 구속을 믿는 전제 아래 역사 속 기독교 진리를 추적한다.
이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도 학문이다. 학문은 관점(觀點)이나 설(說)이나 이론(理論)보다 정교하다. 그만큼 역사에 대한 학문적 축적이 많이 누적되어 왔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인류는 바른 종교나 신을 찾는 작업에 실패해 왔고, 역사의 진실과 진리를 규명하는 일에 있어 일치된 견해를 도출해내는 것이 난해할까?
여기에는 몇 가지 딜레마가 있기 때문이다. 문자와 언어가 없었거나 소멸되었거나 규명되지 않는 선사 시대를 규정하는 일의 난해함, 과거 역사 서술가들이 과연 진실을 바르게 기록해왔을까 하는 의문들, 승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 측면을 과장하고 패자에 대해서는 왜곡된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세계관·역사관이 상이한 민족들의 관점을 학문으로 조율해낼 가능성 여부 등이다.
역사해석의 딜레마
특히 역사 속 인물과 민족과 국가에 대한 평가는 정말 상이하다. 심지어 살아있는 인물이나 국가에 대한 평가조차 우리 인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첨예한 종교나 민족적, 정치적 대립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보는 이유다.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율곡 이이(1537-1584)에 대한 우리 국민의 호감도는 역사 속 어떤 인물보다 좋은 편이다. 특히 과거에 9번 장원한 인물로 모자(母子, 신사임당과 이이)가 모두 지폐에 등장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율곡이 살던 16세기는 국내외에서 율곡 못지않은 천재들이 쏟아진 시대였다.
그런데 선조 초년 관직 생활을 하며 남긴 <경연일기>에 보면, 율곡은 당대 큰 인물들인 이황, 이언적, 권벌, 이준경, 기대승, 서경덕 등을 모두 폄훼하고 있어 놀랍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 같은 품성 때문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그리고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서경덕의 제자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또 그는 9번의 장원 중 8번의 시험을 모두 21세 이후 29세 사이에 장원급제한 반면, 대과에 낙방한 적도 한 번 있었다. 그런데 명종 19년 진사시에 운강 조원(趙瑗)이 만 20세에 장원급제 동방(同榜, 일종의 공동 수석)을 하였으니, 7살 연장자요 학문적 자부심이 대단했던 수재 율곡이 자신과 공동 수석한 어린 조원을 폄훼하려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율곡을 폄훼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율곡도 약점 많고 감정적인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평가는 늘 주관적이라는 것을 율곡 같은 천재를 통해 알리려는 것이다.
특히 죽은 자는 말이 없는 인류 역사를 다루는 데는 당연히 편견과 선입관(prejudice)이 작용한다. 이것이 바른 역사 해석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인간의 미숙성,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는 성경이 말하듯 인간 역사의 죄성(罪性)을 보여준다고 본다. 이 죄성은 필자가 홍수 이후 인류 분산을 다루는 중심된 전제이기에 하는 말이다.
노아 아들 야벳의 후손 마곡은 누구인가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의 이름은 ‘곡의 장소’란 뜻이다. 즉 마곡은 문자적으로는 곡(Gog)이 최고 통치자로 다스리던 땅(혹은 백성)을 말한다(겔 38:2; 39:6). 마곡(Magog, 창 10:2; 대상 1:5)은 성경 안에서 그 혈통 계보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에스겔서를 참조할 때 마곡은 분명 곡(Gog)과 연관되며(겔 39: 6; 계 20:8), 한 통치자(주된 왕, 겔 38: 2, 미국 표준역 ASV) 밑에서 야벳의 다른 후손 메섹과 두발(지금의 터키 북동쪽 앗수르인의 영토였던 무쉬쿠와 타발)과 연합했다는 사실(겔 27:13)은 마곡이 북방의 야만 민족이 되었음을 말해준다(겔 38:15, 39:2). 사실 인간의 죄성 아래 야만적이지 않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스키타이가 된 마곡족
전통적으로 마곡족은 요세푸스의 기록(요세푸스, Ant Ⅰ. 6. 1, 123)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이 되었다. 또한 성경적으로는 많은 학자들이 성경의 마곡과 곡을 동일한 민족으로 간주한다.
요세푸스는 북방(겔 38:15, 39:2)에 살던 사람들은 ‘Magogites’라고 불렸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들을 스키티안(Scythians)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요세푸스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주전 484?-425?)의 책(Histories)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에 대해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민(nomad)’이고, ‘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이며 ‘도시도 성채도 없이 그들의 짐을 직접 끌고 다닌다’고 썼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의하면, 지금의 루마니아(Romania)와 우크라이나(Ukraine)를 포함한 지역의 고대 이름도 스키티아(수구디아, Scythia), 곧 스키타이였다.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족은 아라랏 북방으로 갔으며, 일찌감치 유라시아 대평원의 기마 유목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방으로 간 이들 마곡족은 주전 1200-700년경 볼가강 하류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제로는 구덩고분에서 지하횡혈(굴)고분 그리고 후기덧널무덤(목곽분)의 묘제를 가졌던 것을 밝혀냈다.
유목민들은 언어는 있었으나 정착 문화가 아닌 탓에 고유 문자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유물과 일부 기록에 의지해 그 문화와 문명을 집작해볼 수밖에 없다.
천막에 살며 소와 말을 목축하던 이들은 기동력을 활용하여 주변 문화와 밀접하게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주변 문물도 일부 활용하였을 것이다.
주전 4세기 만들어진 스키타이 귀족의 거대한 고분에서 여자, 노예, 말 등의 순장 물품이 발굴되어 이들의 습속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금, 은, 동 단지와 장신구 그리고 스키타이 특유의 청동솥(동복)과 토기들이 발굴되고 있다.
스키타이(마곡 후손)를 닮은 우리 민족
주전 5세기 이미 역사가 헤로도토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마곡 후손 스키타이족의 기마 유목민들은 동유럽, 터키 아나톨리아,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과 만주까지 이르러 다양한 초원의 제국들을 건설한다.
이들은 스키타이뿐 아니라 흉노와 훈, 돌궐, 위구르, 토번, 투르크, 선비, 티무르, 무굴, 거란(요), 여진(금), 원(몽골), 후금(청) 등의 제국을 이루었다. 이 초원의 땅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그야말로 비단길이요 동서 문명의 교통로였다.
이렇게 이들은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터키, 그리고 한반도 남부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하여 세계 최초로 글로벌화된 민족을 이루었다. 우리 민족도 당연히 이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고멜족을 다루면서, 고멜족을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남쪽(지금의 서남 터어키 방향)으로 밀어낸 민족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것도 이들이요, 동유럽 토착민들이 두려움의 대상인 드라큐라 전설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 스키타이 민족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후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한 이후 140여 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스키타이를 이란인들은 ‘사카’, 인도인은 ‘샤카’, 중국인은 ‘새(塞)’라고 불렀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같은 유목민인 흉노(匈奴)나 훈족(Hun)도 결국 스키타이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곡족의 후손 스키타이족은 유목민의 원조요 흉노는 스키타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그 스키타이의 유목·기마민족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에 있어, 최근 사학자들은 스키타이 영향을 수용하려는 쪽과 만주·발해만 유역의 고조선에 국한하려는 두 입장으로 나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한국 고고학의 원조 중 한 분인 김원룡 박사는 <한국 고미술의 이해>에서 한국 청동기 문화의 특징 중 동물의 뒤틀린 몸이나 서로 싸우는 모습은 스키타이 동물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했다. 하지만 만주 고조선 영역에서도 이 같은 유물이 나온다는 점을 들어, 스키타이 영향을 축소하려는 경향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스키타이 황금전’이나 ‘고대 한국문화에 영향을 미친 북방 초원문화유산- 스키타이 황금전(1991)’이라는 전시 도록(圖錄)도 신라의 황금 문화와 연계시키기 위한 기획으로 보인다.
마곡족과 우리 고대 역사
과거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는 이상한 신화가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들었다.
아마 만주와 산동반도 그리고 상하이 등 중국 동부 해안에서 직접 유입된 도래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남아로부터 해안을 따라 유입된 사람들도 있었다. 즉 한반도는 다양한 외래인들의 문화가 융합한 용광로였던 셈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의 4세기 13대 근초고왕을 소개하면서, 백제를 해양왕국이요 다양한 외국인들이 찾아온 글로벌 다문화국가를 이끈 위대한 군주였다고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문제는 우리 민족 주류를 형성한 왕족과 귀족들이 어디서 왔는 가이다.
한반도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의 <문무왕릉 비문>에 보면, ‘투후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이란 구절이 있다. 여기서 ‘투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서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이 하늘(신)을 섬기던 김일제의 혈통(후손)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경주지역 신라 김씨 왕가의 김알지 후손들은 자신들을 흉노계인 김일손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흉노족들이 유목민이므로 정착 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성곽을 만들어 농사를 지은 사람도 다수 존재했으며, 특히 그들의 유적에서는 과거 한반도 북동 지역 옥저(沃沮) 사람들이 발명했다고 알려진 온돌(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일부 흉노 문화는 우리 땅에 정착하고 우리 민족에 동화되었다.
본래 신라 건국자는 박씨 성을 가진 혁거세(赫居世)였다. 신라 초기 왕호(王號)요 군장, 제사장을 나타내는 거서간(居西干)은 몽골의 게세르(keser) 영웅 서사시에 등장하는 ‘게세르 칸’과 언어학적으로 연관된다.
변한 지역에 존재하던 귀틀집의 기원도 한반도가 아니라 바이칼 호와 알타이 지방 및 애니세이 강 유역이라는 것은 역사적 정설이다.
가야 통치 지역이던 김해 대성동과 양동 고분에서 출토된 솥인 동복(銅鍑)과 철복(鐵鍑) 3개는 모두 북방 기마민족(스키타이 계열)이 사용하던 것들과 용도와 제법에 있어 동일한 것들이다.
삼국사기는 “박혁거세 즉위년에 (고)조선 유민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거주하여 6촌(이, 최, 정, 손, 배, 설씨 촌)을 이루었다” 하여 신라 기원을 고조선 유민들의 이주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신라 총 56대 992년(B.C. 57-A.D. 935) 동안 박씨 성을 가진 왕은 10명, 석씨가 8명, 김씨 성을 가진 왕들이 38명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주로 박씨와 석씨가 왕위에 올랐으며, 김씨들이 왕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7대 내물왕과 19대 눌지왕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왕호도 거서간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뀐다(삼국사기는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 4대,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로 봄). 마립간은 임금이 있는 곳, 곧 강력한 통치자를 지칭한다.
왕호까지 바뀐 것에서 박씨와 석씨를 능가하는 강력한 북방 세력이 어느 시기 남하하였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분명 스키타이(흉노)의 피를 받은 무리들이었다.
금(金)은 농경민족이 아닌 본래 유목민들이 소중히 여기던 금속이었다. 즉 신라 금관도 초원을 달리던 스키타이와 흉노의 유물인 것이다.
최초 금관이 출토된 곳은 남러시아 초원의 사르마트족 묘에서 출토된 주전 2세기 금관이다. 금관의 상징은 나무와 사슴의 녹각 그리고 새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 유목민들의 샤머니즘의 상징이었다. 나무는 신(태양)에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계단이었고, 사슴은 생명을 주는 신이었다. 나무에 앉은 새는 신과 인간을 오가는 전령이었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 흉노의 금관, 스키타이 황금 인간의 모자에서는 이 새가 빛나고 있다. 신라 금관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으로 중국 한족이 아닌 스키타이와 흉노의 영향을 받았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적으로도 우리 민족은 한족과 전혀 다른 우랄 알타이어족이다. 단재 신채호의 말대로 우리 민족은 “만주, 몽골, 터키 등과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재는 조선족과 중국의 한족은 서로 동족(同族)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현재 우리 민족 씨족들의 기원 상당수는 중국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은 중앙아시아 대륙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우리 민족은 어느 경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보통 중국 한족은 함족 또는 셈족과 함족의 혼합 계열로 비정한다. 반면 만주를 통해 들어온 우리 민족은 셈족이나 함족보다 스키타이와 흉노의 계열인 야벳족의 피를 물려받았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창적인 ‘불함(不咸) 문화’를 주창한 육당 최남선도 고대 우리 문화의 전파 그림을 흑해→ 카스피 해→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 알타이 산맥→ 사얀 산맥→ 야블로노이 산맥→ 흥앙령 산맥→ 태행산맥 이동→ 조선→ 일본→ 유구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스키타이는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돌무지덧널무덤(일명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보는 무덤 양식이다. 유명한 천마총은 바로 적석 목곽분의 대표적 왕릉이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적석 목곽분과 더불어 스키타이의 순장 풍습이 발견된다는 점과, 최고 귀족들만이 사용하는 당대 최고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스키타이형 동복과 철복이 발굴되고 있는 것도 한반도의 지배자들의 기원을 기어코 만주와 고조선에 묶어두려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집착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또한 잔인한 순장 풍습의 확인은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일부 기독교도들의 황당한 주장을 무색케 만든다. 김해와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그리고 최근 발굴된 창녕의 가야 고분까지, 가야는 최후까지 순장이 성행한 국가였음이 드러났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대형 고분과 순장의 풍습은 절대 왕권의 존재를 알려주고 인간이 얼마나 잔인무도하고 악한 존재인가 하는 인간의 죄성을 묵시적으로 알리고 있을 뿐이다. 가야 기독교국가설은 이제 조용히 접었으면 한다.
스키타이족은 또한 말을 타고도 활을 잘 다루는 기마 민족이었다. 유효 사거리가 멀고 강력한 ‘맥궁’이라는 화살과 몸을 돌려 쏘는 ‘배사법’을 특징으로 하는 스키타이족은 말을 타고 능숙하게 활을 다루었다.
한자 ‘동이(東夷)’의 ‘이(夷)’는 ‘큰 활’를 의미한다. 즉, 동이는 동방의 큰 활의 민족을 의미한다. 이들 스키타이족들의 탁월한 활솜씨가 세계 최고의 양궁 실력을 가진 우리 동이 민족의 활솜씨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이 같은 기마 민족의 기질은 일본에까지 이르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1948년, 한 좌담회에서 당시 도쿄대 교수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 波夫)는 일본 민족의 주류가 말을 타고 달리던 사람들이라 주장하면서, 일본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들고 나왔다.
기동성을 지닌 기마 민족이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를 경유한 후 신속히 일본 열도로 진입해 통일국가를 실현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신속히’라는 설정은 일본 주류의 한반도(고구려, 신라, 가야, 특히 백제) 기원을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는 고육책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천황가의 기원도 기마 민족에서 유래한다고 보고 ‘기마 민족 정복국가설’을 주장했다.
전 세계 인종 가운데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 어찌되었든 우리와 늘 애증 관계에 있는 일본 아니던가. 마치 가인과 아벨의 관계요, 에서와 야곱의 관계요, 요셉과 그 형들의 관계요,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와 유사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본래 먼 이웃과 갈등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까운 사이가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한반도와 열도가 그렇다. 그러니 일본에서 신속한 ‘기마 민족 이동기원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한양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고 김용운 교수는 이 같은 한일 관계에 대해 “같은 뿌리에서 피어난 다른 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나 <총·균·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한일의 문화와 언어적 친연성을 지적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일 관계에 얽힌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적 섭리는 무엇일까? <계속>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