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의 노래와 코미디를 통해 대중문화를 바꿔놓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말 한 마디가 온 국민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됩니다. 때로는 유행가 가사를 통해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사탄이 방송과 노래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장악한다고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한때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애창된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1997년도에 000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입니다. 이 복음성가 순식간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마다 새 신자 환영을 위해서 또는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 주기 위해 많이 사용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전체 가사의 뜻은 매우 훌륭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유행가 가사를 통해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게 된다고 앞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 복음성가가 유행되기 전과 후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 부분에서 신앙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요구들을 합니다. 어느 날 교회 청년이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목사님 밥 좀 사 주세요. 여러 청년들이 앉았다가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그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님에게 밥을 사 달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저에게 밥을 사 달라고 한 청년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성도들 앞에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청년이 제안을 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성가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교회와 목사님들이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란 주장을 하면서, 요즈음은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성가를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쓰나미 때 인도네시아 아째에서 1년 정도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생필품을 비롯해 많은 물품들을 이재민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행복한 일도 많았습니다. 반면에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째는 100% 이슬람 신자들입니다. 이슬람 문화는 “당신이 나에게 주는 선물을 내가 받아 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물을 줘도 고마운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도리어 빼앗듯이 선물을 챙겨갑니다. 불교의 문화도 동일합니다. 캄보디아에 많은 물품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들 역시도 감사보다는 내가 당신의 선물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선물 받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문제는 사람의 머릿속에 입력된 생각입니다. 사탄은 천사로 가장해 신앙인들의 생각을 바꿔놓게 합니다. 한번 잘못된 생각을 되돌려 놓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신앙을 바꿔놓기는 마약중독자들의 마약을 끊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이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한다는 개념과 받는다는 개념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마 22: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독교 문화와는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개역 눅 6:38) 희생과 봉사를 최고의 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희생과 봉사에 앞장서게 됩니다.
신학시절(1983년)의 간증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문 앞에 정부미 20kg 한 포대와 연탄20장이 있었습니다. 여전도회에서 어려운 신학생을 돕기 위해 구제한 물품이었습니다. 그날 밤 교회에 가서 새벽예배까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제가 거지입니까? 왜 제가 구제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눈물 콧물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제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미국 뉴올리언스 카트리나 때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였습니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와 봉사하는 저희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재미교포인 한 가정에서 자기 저택을 숙소로 제공을 해 주었습니다. 빨래는 물론 매일 아침 식사까지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5명의 봉사자들에게 여비까지 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었고 선물까지 챙겨 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주정부까지 봉사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주정부에서는 명예시장까지 수여를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문화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해 희생과 봉사가 의무입니다. 그 희생과 봉사를 통해 가정과 이웃 사회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국제구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