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교회론과 정치에 관한 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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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칼럼]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의 정치적 책임 (1)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들과 의무들과 사명들 중에는 정부와 정치적 사항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성경적인 관계정립을 위해서는 교회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지난 날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가 정치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떤 사건들을 경험했으며, 칼빈주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공헌을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중요 정치적 사상들과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오늘날 교회의 정치 사회적 역할을 위한 대안마련에 시사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종교개혁은 가장 본질적으로 근대사회로의 발전이었으며, 전 세계 시민들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디딤돌을 제공하였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후로, 개신교 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왕국들의 지배자들에게서 엄청난 핍박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들이 시민전쟁을 감행했고,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는 개신교 교회의 생존을 위해서 종교전쟁을 겪었다. 합스부르크 왕국(스페인과 오스트리아)과 개신교 제후들 (네델란드, 스웨덴 등) 사이에 삼십 년 전쟁 (1618-1648)이 벌어졌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The Peace of Westphalia)으로 종결되었다.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입헌군주제가 견고해졌고, 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정착했으며, 마침내 네델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기독교 정당의 이념을 내걸고 집권하여 시대의 과제를 감당해냈다.

1. 칼빈의 교회론과 정치에 관한 교훈들

필자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 칼빈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대 종교개혁자의 지도자들이, 루터와 츠빙글리를 비롯해서 서로 존경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무조건 답습하지 않고, 창조적인 기여를 남겼기 때문이다. 당대의 논쟁거리였던 성찬론에서도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기념설에서 아쉬움을 발견하고, 독자적으로 성경적인 견해를 찾아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루터와 츠빙글리와 달리, 칼빈은 교회가 세속 정부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가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확실한 제도로 정착시켰다. 동시에 칼빈은 교회 혹은 성직자가 세속 정치를 통괄하는 신정통치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nontheocractic). 루터가 작센주의 군주 프리드리히의 권위 아래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교회가 단독적인 권한을 확보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칼빈은 파악하였다. 또한 츠빙글리가 사역했던 취리히에서도 시당국의 권위 아래서 교회의 모든 개혁적인 조치들이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 칼빈은 교회가 성경적으로 완전히 개혁되려면 이런 세속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자치권을 확보하고 스스로 갱신해 나가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특히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삼 년 동안 머물러 있던 시기에, 마틴 부써가 제시한 교회자치권이 시의회에서 부결되는 실패를 목격했었고, 이것을 교훈 삼아서 제네바에서는 교회의 독립권을 확고히 세우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적으로 실현시켰다. 칼빈에게서 중요했던 점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각자의 자율권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칼빈이 일생동안 철저하게 노력하여 세우고자 했던 원칙은 세속정부로부터 개혁 교회의 독립성, 자치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스위스 제네바는 국왕이나 제후들의 지배를 받지 않던 독립 자치도시로 성장했다. 칼빈의 목회방침에 영향을 받은 후에, 제네바는 시민들의 영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유일한 자치도시로 세워져 나갔다. 제네바와 같은 완벽한 신앙공동체로서의 도시건설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교회의 목회자를 세우는 독립적인 권한을 당회가 확보하도록 최초로 개혁한 것은 결국 민주정치의 시초를 놓는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목회자로서 칼빈은 교회를 향한 호소와는 달리, 시민정부의 정치와 의무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경고와 조언과 반대의견을 발표했다. 이러한 입장은 칼빈주의 전통에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서, 베자와 17세기 칼빈주의에서도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주장했다.

16세기의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상황들 속에서 그 누구도 실현시키지 못했던 영향을 발휘한 칼빈은 교회와 시정부와의 독립적이면서 협력적인 관계 정립을 위해서 획기적인 방안을 정착시켰다. 그가 꿈꾸어 왔던 대로 교회의 독립권은 목회자 선발과 임명의 과정에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받는 것이었고, 또한 성도들의 영적인 권징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내용이었다. 칼빈이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법령”(Ordonnances

Eccléiastiques de l’Eglise De Genée)은 1541년 11월 7일, 200인 의회가 수정·통과했고, 시 총회에는 11월 20일 제출되었다. 이 교회 법령에서 칼빈이 주장한 두 가지 새로운 면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첫째, 칼빈의 정치적인 견해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교회의 자치권 확보였다. 그는 교회의 제도 자체를 신약성경의 초대 교회처럼 완전한 자유권을 가진 별도의 기관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최초의 조치를 제네바에서 성공시켰다. 칼빈은 초대교부들의 시대를 근거로 해서, 교회의 독립적인 자치권을 옹호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제정하신 모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받아들여지면 되는 기관이다. 둘째, 권징의 시행을 교회가 완전히 넘겨받도록 한다는 조항이다. 시 행정 당국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영적인 권위에 의해서 주어진 결정에 따라서 시의 형벌로 보충해 주도록 요청하게 되었다.

칼빈의 성취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을 비교해 보자. 외클람파디우스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사역하면서, 그토록 교회의 권징을 자체적으로 자유롭게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지만,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써 역시 목사회가 약간의 부차적인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 받았으나, 시의회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여서 결국에는 그들의 결정을 수용하고 말았다. 루터나 쯔빙글리는 이런 제도 자체를 아예 목표로 삼지도 않았었다. 바젤이나 베른이나 취리히에서나 그 어느 다른 스위스 자치도시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칼빈은 세속 권세들이 교회를 다스릴 수 없으며,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서 교회는 처음부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어느 정도까지 교회가 이런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원리만큼은 인식되도록 칼빈은 남은 생애를 바쳐서 투쟁적으로 싸워서 교회의 존엄성을 인정받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목사의 안수와 성직 임명은 교회 자체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국왕이나 교황이 성직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오직 지역 교회가 자체 목사의 임명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개혁이었다. 제네바 시의회에서도 새로운 목사 후보를 먼저 제출하고 심사를 받도록 요청했다. 칼빈의 주장은 목사회에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지, 시의회가 관장할 사항이 아니라고 맞섰다. 결원이 발생하면 목사회가 먼저 성경 해석에 대해서 심사하고, 목사들에 의해서 다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목사 안수에 일반 시민들의 결정 권한이 없도록 했으며, 1561년 교회법령에서는 시민들이 팔일 안에 항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새로 안수 받은 목사는 시의회에서 맹세함으로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시의회는 목사회가 결정한 사람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칼빈의 정치적인 관점은 그의 『기독교강요』 마지막 부분에 서술되어 있고, 그 외에도 그의 주석들과 신학논문들에 담겨져 있다. 다른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제네바에서 사역한 까닭에, 칼빈은 교회와 국가가 모두 다 시민들의 권위와 자유와 의무들을 인정할 권한이 있음을 새롭게 서술하였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독일에서 루터파 교회는 불합리한 정부의 행정에 대항하는 신학적인 정당성을 심각하게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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