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요한복음은 ‘말씀(logos)’이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메시지로 시작되고 있다(요 1:1, 14).
요한복음의 끝부분에서 사도 도마는 처음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부인하다가, 결국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베드로(마 16:16), 마르다(요 11:27), 도마(요 20:28)의 3대 신앙고백 중 하나다).
신악 성경의 다른 몇몇 구절에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으로 지칭하고 있다(행 20:28, 롬 9:5, 살후 1:12, 딛 2:13, 히 1:8, 벧후 1:1, 요일 5:20).
물론 이 구절들의 독법이나 여기 사용된 헬라어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기에 논란의 여지는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이 선언들이 거대한 신학 이론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어릴 적부터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믿어왔으며, 어떤 인간도 신격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님=하나님’이란 말은 그들의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약성경 곳곳에서 보다 완곡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종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을 가리켜 유일무이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지칭하셨다(마 11:25-27, 24:36).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아들’로 묘사하셨다(막 1:11, 9:7). 제자들도 이 주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예컨대 요한은 불과 5장밖에 안 되는 요한일서에서 무려 22회에 걸쳐 “예수님=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요 20:31).
유대인에게 있어 이 표현은 단순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묘사된 적이 없으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가리켜 ‘아빠(아버지)’라고 불렀던 사람도 없었다(막 14:36).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요 14:10-11)” 같은 표현은 예배자들이 느끼는 하나님께 대한 소속감을 훨씬 뛰어넘는 표현법이다. 유일무이한 가족관계로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신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1:35)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관계되어 있다. 때때로 예수님은 죄 사함(막 2:5-12), 심판(마 7:21-23, 25:31-46), 생명 주시는 일(요 5:25-29)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자신도 한다고 주장하셨다.
바울과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창조됐다고 주장함으로 예수님이 천지창조 이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요 1:1-4, 고전 8:6, 골 1:15-17).
이처럼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구약성경 본문을 서슴없이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다(롬 10:9-13, 히 1:8-12).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경배와 기도드린 것을 보여주고 있다(행 7:59, 9:10-17, 고전 1:2, 계 5:8-14).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아람어)’라는 기도문을 사용했다(고전 16:22). 유대인들이 불과 몇 년 전에 죽음으로 내몰았던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권위를 표현하는 구절들이 예배와 찬양에 사용한 것도 있다(요 1:1-18, 빌 2:6-11, 골 1:15-20, 히 1:2-3). 예수님의 삶과 죽음 및 부활 이후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보다도 태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했던 신령한 분으로 이해한 것이다(요 17:5, 24).
우리도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였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찬양해야겠다(마 1:23).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