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기독교인들 주도했지만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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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뒤돌아보는 3.1운동, 기독교, 한국교회 (3)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리며 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석호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리며 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석호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2. 기독교계의 3.1운동 이해

앞에서 일반 사학계의 3.1운동에 대한 그간 연구에서의 논쟁점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계의 3.1운동 관련 문서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는 3.1운동을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이데올로기적 이념, 곧 저항 정신의 이념적 근거로 원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에 있어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공정하지 않게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런 점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민족주의적 해석

일제 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3.1운동 해석에 있어 민족주의적 경향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으로부터 자유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역사의 3.1운동’(historic Samil independent movement) 탐색은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식민주의나 종족 민족주의로부터 자유한 사실 그대로(what actually happened, wie es eigentlich gewesen) 혹은 있었던 그대로(as it was)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1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上海: 維新社, 1920)에서도 민족주의적 접근은 불기피했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200만을 넘었고, 참집(參集) 횟수는 1,500여 회에 달했으며, 전국 218개 군 중에서 211개 군이 이에 가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기백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 자료에서는 770여회의 시위, 연 참가인원은 46-50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축소된 통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박은식 통계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최근 연구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년 2월 20일 발표한 통계에서는 만세운동 기간 동안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80-100만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연구는 2016년 이래 3년간 전문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물이라고 밝혔으므로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참가 인원에 있어 박은식의 통계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통계보다 2배 이상 산정된 통계임을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계 인물 중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인물로서 1970년대 후반부터 3.1운동과 기독교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했고, 3.1 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기여를 추적한 점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기독교회가 만세운동의 준비과정, 실행과정 거사 단계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외에도 박명수, 윤경로 교수 등의 연구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사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3.1운동 참여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민족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기독교인들의 만세 독립운동 참여를 민족주의적 동기에서만 관찰한다면 기독교적 정신이나 가치 신앙적 동기는 훼손되고 만다.

민족주의는 역사 언어 문화 관습 혹은 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종족주의로서 내적인 일치나 단결을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폐쇄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만세운동 참여에 있어 민족적 동기 외에도 신교(信敎)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신앙적 동기가 있었음을 여러 증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이유라기보다는 민족정신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3.1운동이 아무리 성서적이고 정당하고 기독교인들이 대거 주동세력으로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운동이라기 보다는 민족운동이라는 점이다. … 3.1운동이 국권회복을 통해 민중 민주를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운동임을 분명히 할 때만이 이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및 기독교인의 위상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기독교 세력이 주도했다 할지라도 이 운동은 교회 운동이 아닌 민족운동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면 타당한 주장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민족적 동기에서 찾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입장은 2000년대 초부터 교계 일각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헬본 선교사가 보관하던 100년 전 독립신문. ⓒ양화진문화원 제공

▲헬본 선교사가 보관하던 100년 전 독립신문. ⓒ양화진문화원 제공

2) 정치적 해석: 반체제적 이념화

기독교계의 3.1운동 이해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정치적 해석, 곧 이념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1운동은 기독교회가 중심이 된 행사이자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음으로 해방이후 교회는 3.1운동과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해방 후 처음 맞는 1946년의 3.1절 기념식은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개최되었고, 남한에서도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이 별도의 행사를 개최했다.

북한에서는 교회가 중신이 되어 평양에서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했는데, 소련군에 의해 급조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교회가 주심이 된 기념식을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북한에서 기독교와 공산정권과의 최초의 대결이었다. 비슷한 일이 의주에서도 발행했다.

남한에서의 경우, 1948년 건국 후부터 20여년 간은 국가 주도로 3.1운동을 기념해 왔고, 기독교계는 수동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러다 만세운동 50주년을 맞는 1969년 이후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지금의 한국기독교회협의회, NCCK)가 기념식을 주도하면서 이때부터 3.1운동을 기념하는 일은 정치적 성향을 띄게 된다.

그 동안 교계는 3.1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학문적으로 연구한 바도 없다. 단지 3.1운동을 기념하면서 정치적 성격, 곧 반체제적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즉 3.1운동을 당시 반정부적인 활동의 이념적 근거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러다 1975년 3.1절 기념식은, 정지강의 지적대로, 정치화 혹은 이념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NCC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기독교 단체들이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체제적인 행사로 치러졌다.

정지강은 3.1절 기념식은 1975년부터 노골적으로 이념화 및 민중화의 길을 가가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1976년 3.1절 기념식은 이런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 때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천주교와 진보 측 기독교계 연합 기념식에서 문익환이 초안한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일로 정치인들 외에도 교계의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등이 구속되는 정치적 사건으로 급격히 발전했다.

문제는 3.1운동 정신보다는 3.1절 기념행사를 이용하는 3.1운동의 정치화 혹은 이념화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3.1독립운동 정신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실제적인 3.1운동 연구, 특히 한국교회의 3.1운동에의 관여나 역할 등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을 진작시키지 못했다. 국가권력에 탄압에 맞서 신교(信敎)의 자유 혹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투했던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진지하게 숙고되지 못한 일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입국금지를 당했다. 한국인의 심성과 종교성, 특히 유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입국금지를 당했다. 한국인의 심성과 종교성, 특히 유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3) 3.1운동에서의 선교사들의 역할

일반적으로 3.1운동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표명되어 왔다. 이 점은 일반 학계나 교계에서 동일하게 지적되어 왔다.

어떤 이는 3.1운동은 선교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났고, 그들은 제국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다수의 학자들은 삼일운동은 윌슨의 자결주의와도 무관하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민중들에 의해 의도되고 기획된 민족의 주체적인 결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 매쿤(George S. McCune)이나 모우리(E. M. Mowry) 등이 만세 시위자들을 숨겨주거나 보호해 준 일을 언급하거나 선교사들에 의한 해외 여론 형성 등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한국 교계 주류는 선교사들의 기여나 역할을 무시해 왔다. 대체로 선교사들의 간접 참여를 제시하고, 일본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정도다.

3.1운동은 선교사들과 무관하게 일어났고 선교사들이 간접 참여했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사실상 독립정신과 만세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시했던 것은 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이 정당하게 강조되지 못했다.

우선 고려해야 할 점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서 국내 정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미국 북장로교(PCUSA) 선교부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de facto)의 현실로 수용하고 있었고, 정교분리 원칙이 1901년 이래 적용되고 있었으므로,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국내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의 기준(de facto standard)이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가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비록 선교사들은 ‘간접적으로’ 참여했지만, 선교사들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선교사들의 선교·교육·의료 사업은 그 자체가 조선인들의 의식을 계몽하였고,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는 자유·민주·인권·자주 의식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가르쳤다. 이것이 독립운동의 근간이 된 것이다.

초대 선교사 곽안련의 손자인 도날드 클락(Donald Clark)은 삼일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여를, 가담자들에 대한 보호(sheltering), 부상자에 대한 치료(treating the wounded),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investigating the Che’am-ni massacre), 영사관 및 본국 위정자들을 통한 항의(protests to Consuls and constituencies at home), 그리고 여론 형성을 통한 항의(protests in the press) 등 5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 이런 사후 조치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1880년대 후반 이후 조선에서의 선교활동 자체가 자유·민주·인권·독립 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가르쳤고, 기독교 학교에서의 언론(言說) 집회 출판의 자유 등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은 3.1운동이 발발하고 확산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대 민주적 가치교육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 때문에 일제는 선교학교에 대해 주목하고, 감독하고, 교육 자체를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해서 교육총회 사건’이나 1911년의 ‘105인 사건’은 자유와 독립 정신을 가르치고 고양하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지역 거점은 평양 숭실, 선천의 신성과 보성여학교, 서울 세브란스, 부산 일신여학교 등 선교학교였고, 선교학교가 만세운동의 전파와 시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선교학교(기독교학교) 학생들이 자유·민주·인권·독립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제는 만세운동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인식했다. 선교사들은 아직 미개한 조선 사람들에게 서구의 자유·민권·민주주의 등과 같은 문화를 이식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선교사들이 직접적으로 만세현장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이런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규 박사. ⓒ크투 DB

▲이상규 박사. ⓒ크투 DB

이상규 박사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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