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뒤돌아보는 3.1운동, 기독교, 한국교회 (4)
3. 기독교는 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 기독교계가 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왔을까?
2월 1일(음력 1919년 1월 1일) 만주 지린(吉林)에서의 무오 독립선언,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청년단의 조직, 국내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고,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의 인적 구성에서도 기독교는 50%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삼일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 기독교회와 지역 거점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3월 1일 만세운동의 경우, 서울 이외 8개 지역은 전부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평양과 의주 만세시위 주동자는 김선두 강규찬 유여대 등 목사들이었다.
만세운동 초기 1,200여회의 시위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회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이 되는데, 이 중 기독교가 주도한 지역은 78개 지역이었으나 천도교가 주도한 지역은 66개 지역, 42개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지역이었다.
이 점은 삼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다수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20만에 불과한 기독교는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회가 삼일운동의 준비·동원·거사 등 전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기독교계의 참여가 없었다면 삼일운동은 사실상 전 민족적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에 대한 관여 혹은 참여는 ‘기독교회’라는 교단적 합의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에 의한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서 경계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민족적 혹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의 적극적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무엇일까? 혹자는 민족적 동기를 강조하고 그것이 주도적인 동인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다음 3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1910년 이래 10여 년 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험적 현실이 시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배경이 된다. 1876년 운양호(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 이래 점진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고 청일전쟁(1894-1895)으로 청나라 세력을, 러일전쟁(1904-1905)으로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을 채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강탈하고, 1907에는 조선 군대를 해산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하고 1910년 8월 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강탈하여, 1392년 창건된 조선왕조는 27대 순종을 끝으로 518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통감부는 총독부로 승격되고, 3대 통감 데라우찌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여 입법·사법·행정 및 군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며 무단정치를 감행했다. 집회 취체령을 공포해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헌병과 경찰 제도를 일원화하여 조선주차헌병조례를 발표했다(1911. 9). 1911년 당시 일제는 헌병대 935개 처, 7749명의 헌병, 경찰관서 677, 경찰수 6,222명에 달했다.
1910년 12월에는 ‘범죄즉결례’을 공표한 이래 4대 악법으로 불리는 ‘경찰법처벌규칙’, ‘조선태형령’, ‘민사소송조정령’을 바탕으로 폭압정치를 강화하였고, 토지조사 사업(1910. 3- 1918. 11)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경제구조를 식민지 수탈구조로 재편했다. 또 회사령(1910) 어업령(1911) 광업령(1915)을 공포하여 민족 자본 발전을 방해하고,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1911), 개정 사립학교 규칙(1915)을 제정하여 민족교육 혹은 종교교육을 봉쇄했다.
이와 같은 폭압적인 무단정치 10년이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위협했다. 자본가 농민 노동자 등 사회 구성원 각계각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음으로 그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높아졌고,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반발이 거국적인 만세운동의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사는 시민으로서 시민적 각성에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은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였다.
한국교회는 1900년대 이후 역사적 환경 때문에 민족의 현실과 함께하는 교회였고, 반일(反日)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독립운동에 무심하지 않았다.
안악 사건에 이은 105인 사건은 한국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105인 중 91명이 기독교 신자였는데 장로교인으로 민족 대표였던 이승훈·양전백·이명룡은 105인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다시 3.1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이들이 3.1운동에도 앞장섰다는 사실은 3.1운동이 105인 사건 연루자들의 민족운동의 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민족운동의 전통이 만세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의 배경이 된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사례와는 달리 한국은 비(非) 혹은 반(反) 기독교 국가인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다. 이에 한국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교회의 민족 혹은 독립운동에의 적극적 참여의 배경이 된 것이다.
셋째, 가혹한 통치에 대한 반박이나 민족적 동기 외에도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이 보다 주효한 이유였고, 만세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한국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의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 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를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한국 기독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여, 각종 제재를 가했다. 종교활동을 규제하려는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은 첫 법적 규제였다. 이후 기독교 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사립학교 규칙’을 재정하거나(1911) 개정하고(1915),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
안창호가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은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어우러진 상호 연관은 저항의 힘이었고, 기독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가져온 배경이 된다.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 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끝>
이상규 박사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