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하늘 창문
아침이 밝아오면 창문을 활짝 연다. 숙면의 호흡으로 오염된 방안 공기를 정화시키는 맑은 공기의 유입은 언제나 상쾌하다. 물론 주거 환경에 따라 창문으로 유입되는 맑은 공기의 질은 다르다.
창문의 의미는, 실내 온도를 유지하면서 밖의 풍경을 관조하기 위한 주택의 필수 여건이다. 하지만 허술한 창문은 오히려 도둑이 침범할 수 있는 통로로 작용하기 때문에, 답답함을 감수하면서 창살을 설치하기도 한다.
창살은 언제나 좋은 의미는 아니다. 갇혔다는 이미지로 감옥을 연상시킨다. 감옥은 여러 겹의 창살을 설치하고 죄수들을 가두는 형벌의 장소다. 그러나 과연 창살에 갇혀있는 자만 불편한 장소가 감옥일까.
갇혀 있는 자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재원이 소모된다. 갇혀 있지 않는 자들은 갇혀 있는 자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은 물론 최소한의 육체적 운동과 건강 유지를 위한 섭생 등의 수감 질서와 교정 질서를 규칙으로 정해 놓고 이를 준수하고 있다.
교정 관계자들은 규칙적인 훈련과 야간 근무까지 하면서 갇혀 있는 자들을 지키고 있다. 수감자의 시선으로 보면, 먹여 주고 지켜주니 뱃속 편한 세월이라고 헛웃음 칠 환경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누가 누구를 가두고 지키는 것일까. 수감자나 지키는 자나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궁창 아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물질이라는 감옥, 음란이라는 감옥, 명예라는 감옥, 안락한 미래라는 감옥, 전통을 비롯한 고정관념 또는 통념이라는 감옥, 우상숭배라는 감옥에 갇혀 인류 모두가 코로나19 바이러스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7)”.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명을 잃고 있다. 지구촌 전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집단 면역 체제 구축을 위해 백신 접종을 서두르고 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의 부작용과 변종 바이러스는 인류의 생존 몸부림마저 비웃고 있는 듯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시 33:5)”.
코로나19 바이러스 형벌은, 인류가 저지른 죄업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다행한 형벌이랴. 한량없는 은혜와 용서, 배려와 긍휼의 형벌이다.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을 방주로 보호하시고, 사십주야(四十晝夜) 비를 내리게 명령하신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신 때를 생각하면, 코로나19 바이러스 형벌은 참 회개의 시간이요 창조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욥 35:5)”.
인류는 하늘 창문을 열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형벌을 받게 된 죄업을 자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외면한 죄업을 토설하고 회개의 무릎걸음으로 하늘 창가로 다가가야 한다.
눈에 보이는 창살을 만들어 가둔 자나 창살 안에 갇힌 자나, 모두 창공 저 너머 하늘 창문을 열어야 한다.
하민국 목사
웨민총회신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