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NEW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18) 함의 자녀
애굽·블레셋, 미스라임 후손으로 창세기 소개
애굽과 팔레스틴의 조상, 함의 자녀 미스라임
창조주 하나님 섭리 속에서 늘 주목받는 민족
애굽과 팔레스틴의 조상은 누구인가? 함의 자녀 미스라임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세기 10:6)”.
미스라임 후손들의 정착지
최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사고로 선박 통행이 한동안 막히면서,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가 세계적 관심 지역으로 다시 떠올랐다.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유라시아의 해상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한때 세계 문명의 개화 지역이었던 이 이집트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히브리어로 미츠라임은 동쪽이라는 뜻임)’은 우리 성경에서 통상 ‘애굽’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즉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지금의 이집트 땅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미스라임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은 단순히 애굽만이 아니었다. 미스라임은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성경에는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의 미스라임 후손들 이름이 등장한다.
같은 함족 미스라임 후손인 이집트와 팔레스틴
성경은 미스라임 후손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팔레스틴)이 나왔다고 했다(창 10:14). 애굽과 블레셋은 같은 미스라임 후손들인 것이다. ‘아나밈’은 “바위 같이 단단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나밈의 후손들은 고대 구레네 혹은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진출했다. 르하빔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족의 일부가 되었다. 납두힘의 후손들도 델타 지역의 원주민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드루심은 바드로스(상 애굽) 지역을 차지하였다. ‘갑도림’은 ‘갑돌’의 복수형이다. 갑돌은 블레셋의 기원이 되는 땅이었다(렘 47:4; 암 9:7). 즉 성경은 가슬루힘뿐 아니라 갑도림도 블레셋의 일부가 되었음을 묘사한다(신 2:23).
그렇다면 블레셋의 참 주인은 누구일까? 이 문제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난제로 남아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블레셋 사람들이 어디로부터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하여 왔는지 먼저 밝혀져야 한다.
블레셋의 상당수는 가슬루힘이 거주했던 나일강 삼각주와 지중해 크레타 섬 서편에 거주하던 족속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으로 서진(西進)하여 애굽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한 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듯이, 블레셋 사람들도 애굽 땅 나일강 삼각주와 크레타 섬에 진출했던 함의 일부 족속들이 다시 돌아와 갑도림의 후손들과 섞여 팔레스틴 땅에 거주하게 되면서 오늘날 팔레스틴의 원주민을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대 애굽 문명을 이룬 미스라임의 후손들
애굽이라는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보이는 것은, 성경을 제외하면 기원전 8세기 경 호머의 오딧세이에 ‘아이굽토스(Aiguptos)’라는 명칭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말은 하 이집트(북 애굽)의 수도 멤피스의 일반적 명칭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하 애굽만을 지칭한 이 말은 상·하 애굽 전체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호 9:6; 사 19:13). 세상 기록에는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하나, 성경은 이미 창세기에 아브라함 시대부터 애굽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애굽 문명의 연대가 대단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은 비옥한 나일강 양쪽 주변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문명을 이루어 세계 초대 문명을 이루었다. 이 비옥한 땅에 미스라임 후손들과 셈의 후손 일부가 모여들었다. 그 셈의 일부 가운데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도 끼어 있었다.
상·하 애굽을 통일한 ‘나르멜’의 제 1왕조가 시작된 것은 주전 3,200년경이었다. 애굽 역사학자 매네토의 구분에 따르면, 구 왕국에 속하는 3-6대 왕조(주전 2690-2181) 시대에 이미 애굽은 피라밋 황금시대를 맞는다. 애굽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한 곳으로 알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미스라임 후손 중심의 이 지역에 셈족 후예인 힉소스 족이 침범하여 잠시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한 때는 제 2중간기로 불리는 제13-17왕조(주전 1785-1570) 때였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애굽은 이렇게 아브라함이 족장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이미 피라밋을 건설할 정도로 세속 문명이 발달한 대 왕국이었다.
성경은 애굽의 바로가 아브라함의 ‘심히 아리따운’ 아내 사래에게 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14). 65세의 사래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애굽 왕이 반했던 걸까?
당시 생태와 환경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사래는 127세를 살았다. 그렇다면 아마 당시 여생의 절반을 산 사래의 미모는 지금의 30-40대의 모습과 유사했을지 모른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뺏기지 않고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섭리) 덕분이었다.
애굽과 이스라엘 그리고 출애굽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애굽 문명을 일구어 번성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운명적 만남을 가진다. 이 역사적 만남은 무엇보다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애굽 방문 이후 증손자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애굽에서 현달(顯達)한 요셉의 도움으로 야곱과 그 후손들은 비옥한 애굽 고센 땅에 정착하여 4세기 동안 애굽에서 살았다(창 15:13).
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파라오가 등장하면서 야곱 후손들은 시련에 처하고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 노예의 질곡(桎梏)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귀향시키게 된다.
이 내용은 마귀의 지옥 권세에서 하나님 자녀들을 건지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약 모형(模型)이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도대체 언제쯤 애굽을 떠났던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제18왕조(주전 1570-1293) 아멘호텝 2세(1450-1419) 시대 전후로 보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된 것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4년(왕상 6:1)이었다. 이 시기는 주전 960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출애굽 시기는 대략 주전 1,440년경이 된다. 사사 입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헤스본 일대를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삿 11:26)고 말한다. 입다 활동 연대는 주전 1100년경이었다.
그렇다면 아멘호텝 2세 시대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주장은 성경의 연대기와 잘 맞아 떨어져 보수적 성경학자들이 선호하는 견해다.
이와 달리 제19왕조(주전 1314-1194 또는 1293-1188) 라암셋 1세(1314-1312 또는 1293-1291) 또는 라암셋 2세(주전 1299-1232 또는 1279-1212, 주: 앞의 연대가 좀 더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보수적 연대이고 뒤쪽의 연대는 세속 고고학에서 보는 연대임. 여기서는 주로 성경적 연대를 존중함) 시대로 보는 입장이 있다.
애굽에는 제19왕조부터 제20왕조 사이(주전 1314-1085)에 라암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11명의 왕이 있었다. 출애굽기에 모세 출생이전 국고성 라암셋 건축 이야기가 나오므로, 모세의 출애굽을 자연스럽게 라암셋 성 건축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중 성경의 라암셋을 67년 통치했다고 알려진 라암셋 2세로 보는 견해이다. 그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힛타이트족과 전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즉위 21년에는 힛타이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나라가 공동으로 해양 세력에 맞서 싸우는가하면, 오늘날까지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부심벨 신전과 카르낙 신전 그리고 라암셋 왕궁(출 1:11) 등 많은 기념물을 건축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미라(Mummy)가 남아있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동원된 국고성(國庫城) 라암셋 성은 당시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이 성은 이후 400여년 이상 존속되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갈 때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창 12:37; 민 33:3,5).
성경의 국고성 라암셋 건축이 라암셋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경우, 국고성 건축은 모세가 태어나기 전인 라암셋 1세(3년 통치)나 세티 1세(23년 통치) 때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출애굽은 라암셋 2세 때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진다. 왜냐하면 출애굽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으므로, 대략 주전 1314-1289년 사이 즉 3년 내지 20여년 만에 모세가 80세가 되었다는 모순의 발생을 막으려면 라암셋 1세나 세티 1세가 아닌 라암셋 2세로 봄이 좀 더 성경에 접근할 수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수적 학자들이 아멘호텝 2세 전후를 출애굽 시기로 보는 반면 세속의 고고학 성과를 수용하는 학자들은 라암셋 시대 출애굽을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이 두 주장은 사사건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요단 동편 땅에는 주전 1900-1300년에 정착민들이 없었으므로, 에돔 족속과 같은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람세스 시대 때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반대하는 측은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주전 16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반박한다. 후기설의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1300년까지 ‘하솔(Hazor)’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솔이 두 번 멸망했다고 말한다. 1차 멸망은 여호수아에 의해서이고, 그 후에는 드보라와 바락이 하솔을 무너뜨렸다(수 11:6-14; 수 19:36).
이후 솔로몬 왕은 하솔 성을 요새화하여 홀레 평원과 북방 지역을 지키는 요충지로 삼았다(왕상 9:15). 하솔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이 성읍이 1400년경에 멸망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물론 출애굽의 시기에 대해 양측은 서로 입장을 전혀 양보하지 않고 팽팽히 맞서 있다.
메르넵타 석비가 말하는 것은?
19세기 말 애굽 테베(Thebes) 지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바로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의 발견이었다.
메르넵타(주전 1224-1214 또는 1212-1202)는 라암셋 2세의 아들로 그를 이어 애굽 파라오가 된 인물이다. 검은 화강암에 상형문자들로 가득한 높이 2미터 조금 넘는 이 석비는, 주로 애굽 파라오 메르넵타가 리비아를 공격할 때 탈취했던 노략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마지막에 놀랍게도, 파라오 메르넵타가 이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성경을 제외한 문헌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씨(후예)는 이제 없다. 후르(지금의 시리아)는 애굽을 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주전 1215년(또는 1207)이며 메르넵타의 가나안 침략은 주전 1220년(또는 1212)년 일어났다. 메르넵타 시대 가나안 땅에 애굽 파라오가 맞서 싸우고 그 전쟁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정치적 이스라엘 세력이 존재했다는 언급은, 아무래도 라암셋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다는 주장에 불리한 고고학 자료라고 볼 수 있겠다.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에서 수몰당한 애굽 군대가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추적해 와 정복했다는 것은 성경 기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르넵타의 가나안 원정과 이스라엘과의 전투는 출애굽 이후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황금 미라 두상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왕(주전 1334-1325)은 제18왕조 후기의 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투탕카멘 왕 즉위 약 10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성경적으로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보여 진다.
앞의 두 주장은 모두 성경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 팽팽한 두 입장 가운데 어떤 주장이 더 타당한지는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더 지켜보기로 하자.
아무튼 고대 인류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한 지역으로 20세기 초 강대국 프랑스와 영국의 수에즈 운하 소유를 거쳐 20세기 중반(1956년 7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유라시아를 해상으로 직접 연결하는 운하까지 소유한 이집트는 성경 속이든 세상 속이든 평범한 민족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스라엘과의 역사적 운명적 얽힘이나 최근의 아랍 민주화 운동, 알렉산드리아의 철학과 헬라파 신학과 영지주의까지, 그리고 핍박의 삶을 여전히 이어가는 단성론의 콥트 기독교까지 이집트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늘 주목받는 민족으로 남아있다. <계속>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전 김천대-안양대-평택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