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왜 능동적 순종을 믿어야 하는가? (6)
4.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
이 연구에서는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와 의로움의 전가에 대해서 주목하되, 의로움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에서의 사역은 아담의 행동과 긴밀히 연계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시작된 두 대표자들의 대조는 19절에서 압축되어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부조리와 불행한 죄악의 참상은 아담과 이브에게서 시작되었고, 인류사회에 계승되고 있으며, 문화와 문명을 담아나가는 세계사의 적나라한 실재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아담의 실패와 그 후손들의 죄악이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복음을 받게 하여 새언약을 맺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는 아담의 죄악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시작을 보여주셨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기 밝혀졌다. 아담은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서 실패했으나, 그리스도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완전히 승리를 쟁취하셨다. 히브리서 2장 6-9절에서도 이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된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자 머리가 되신다. 이 땅 위에 오셔서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것들을 완전히 다시 성취를 하셨고, 십가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그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신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고, 이제는 새사람이다 (고후 5:17).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신 것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뿐만 아니라, 죄없으신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기에, 그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후 일생 동안 율법을 모두 다 지키고 사탄의 미혹을 이겨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의 율법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 기본 바탕에 있다. 그래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평생 동안 지속해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고자 살아간 것을 “능동적 순종”이라고 따로 구별했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고난과 저주를 받고 피흘려 죽기까기 순종하신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고 규정하였다. 두 가지 개념을 후기 종교개혁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다뤘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개념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눠서 칭의와 의의 전가 교리의 근거 (the ground of justification)로 삼는 것이 타당한가?
이렇게 두 개념의 형용사를 사용해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 구별할 때에 (distinguished chronologically) 오묘한 복음의 비밀들을 인식하게 된다. 즉,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이후로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모든 율법을 지켜서 완전하게 순종하셨음을 말하는 것이고, 수동적 순종은 마지막 절정의 단계인 십자가 상에서 피흘려 속죄의 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하심을 말하기 때문에, 구속사의 진행과정을 보면 두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 나눠봄으로써, “능동적 순종”의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없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서 4:15-16에서 "우리에게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가 지상에서 살아간 모든 날 동안에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완벽한 순종을 하셨기에,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히브리서의 설명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6-18).
그러나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들, 그것만이 이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능동적”이라는 형용사는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그의 생애의 모든 순간마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심을 의미한다. “수동적”이라는 형용사는 원래 라틴어 동사, “파티오르”(고난을 당하다)에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도가 전 생애를 순종하신 가운데, 특별히 마지막에 그가 몸과 영혼 안에서, 전체 인류의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한 것이다.” 위 문장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37번에 설명되어져 있다. 앞으로 우리는 60번 문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뤄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용어들을 사용할 때에, 결단코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두 가지로 분리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지상생활의 전체가 다 하나의 순종하는 삶이었는데, 더욱 더 정점에 이르러서 처절한 희생이 개입되어 있는 부분을 강조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찰스 핫지 교수는 이 두 가지의 형용사를 붙혀서 설명하고자 한 바는 그가 인간으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부활하기까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속 언약에 따라서 자발적인 확실성을 실행하고, 또한 행위언약에서 요구된 둘째 아담의 구원사역을 성취하고자, 성자께서 성육신하여서 이들 언약들의 법적이 요구들을 성취하셨음을 믿는다. 성자께서는 이들 언약들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능동적인 고난을 당하는 순종을 하심으로서, 죄값을 지불하고 진노를 없애주셨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칭의와 영생을 주실 수 있게 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의 의로움을 전가 (imputation)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성취하셨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율법의 요구들을 온전히 순종하신 것을 가리킨다. 수동적 순종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린 결과로 받게 되는 형벌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을 말한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으로 영화로우신 지위로 복귀하셨다.
수동적 순종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에 순종하신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을 이루고자 수동적 순종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할 때에,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는 고난을 예수님은 전혀 당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다.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하는 재해들, 압박들, 거부당함, 상처들, 고통들을 예수님도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덤에 장사되기까지 다 체험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고난받는 종”이다 (사 53:1-9).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선포했다 (요 10:17-18). 그분은 순교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중보자의 피와 눈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막 10:45). 메이첸 박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 동안 벌어진 일은 죄의 값을 지불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영광스럽게 준수하는 일부분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므로 전혀 그렇게 순종할 것을 그 누구도 요구할 수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서 사셨다.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생애를 간략하게 압축하자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다소 신학용어 상의 오해가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 이런 개념이 쓰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라는 개념이 훨씬 더 비중 있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희생, 즉 순종하심으로 이뤄낸 대속제물 되심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얻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우리 믿는 성도들이 전가 받는다는 것이 대속적 형벌이라는 속죄론의 핵심사항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물론이요, 루터파 신학자들까지도 대부분 동의하고, 공유한 부분이다. 기본 개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에 대해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 하신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이루심으로써, 율법 앞에서 완전한 의로움을 성취하셨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만드셨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60항목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마치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자들처럼 인정을 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것으로 전가한다는 점이 칭의와 성화의 긍정적 요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 요체이다.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루터와 칼빈 모두 다 칭의 교리를 중요시했는데, 교회가 세워지느냐 무너지느냐를 결정한다고 판단했다. 종교개혁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집요한 공격과 알미니안주의가 대두되는 혼탁한 상황 속에서 이 교리를 지켜내고자 노력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와 그 기초인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처럼 한가롭게 탁상 공론하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이 주제와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 후기, 17세기 프랑스 개혁주의 교회들은 이 문제를 매우 민감하게 다뤘고, 각 지역에서 문서들을 작성하였는데, 한결같이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과 루터파 주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로움과 함께, 능동적 순종의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는 “의로움의 전가” 교리를 확고히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이라는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후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에서 언약사상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었고, 성경연구을 통해서 복음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17세기에는 행위언약의 개념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었는데, 일부 신학자들은 “자연언약” “생명언약” “에덴언약”등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최근에 행위언약의 개념을 “아담적 시행”으로 바꿔서 부르는 것을 제안한 머레이 교수는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강조하는 신학자이다. 앞으로도 논의를 하겠지만, 필자가 분석한 바로는 행위언약의 개념을 거부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에도 반대하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