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NEW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21) 함의 셋째 붓
셈족(유대인)이 버린 예수, 함족(붓) 이 바로 세우다(2)
함의 후손 ‘붓’의 땅, 어거스틴 등 라틴 신학 시작된 곳
북아프리카에 빚을 진 기독교 신학, 이제 그들을 위해
◈‘붓’이 정착한 북아프리카 땅의 주인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모리타니 등을 마그레브(Maghreb) 5개국이라 한다. 마그레브는 아라비아어로 <일몰(日沒)의 땅>이라는 뜻이다. 함의 아들 붓이 도달한 곳은 이렇게 낯설고 먼 일몰의 땅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 토착 원주민을 베르베르인이라 부른다. 베르베르인의 명확한 기원을 밝혀줄 진전된 고고학적 연구는 아직 없다.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베르베르족은 알제리를 비롯해 모로코와 리비아, 이집트 나일 계곡 서쪽 등 사하라 사막 이북(북아프리카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11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하기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들이었다.
모로코에 가장 많은 베르베르계(인구의 약 35-40%)가 거주하고, 알제리에서는 전체 인구의 20%인 700만 명 정도가 베르베르인이다. 튀니지, 리비아 등에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지만, 본래 아랍 민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아랍인보다 피부가 희다는 게 특징으로 유럽의 피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옛 그리스인들이 지은 ‘베르베르(barbarus, 로마 세계 밖에 사는 비문명인)’란 이름 대신 스스로를 ‘아마지그(imazigen, amazig, ‘고귀한 출신의 인간)’라 부르고 있다.
아마지그는 고유어로 ‘자유인’이란 뜻이다. 알제리 수도 동쪽 100km에 위치한 인구 15만의 도시 ‘티지 우주’는 거주민이 모두 베르베르 사람인, 알제리 베르베르 족의 중심 도시다.
이곳 도심의 베르베르 문화관에는 베르베르어 보급에 앞장선 언어학자이자 작가인 물루드 맘메리의 동상이 서 있을 만큼, 지금도 이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대단하다.
성경적으로 보면 ‘붓’의 후손과 ‘베르베르’인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모로코와 알제리에 베르베르인들의 인구 분포가 밀집되어 있음을 살펴볼 때, 애굽(미스라임)과 떨어져 붓의 초기 후손들은 북서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서쪽 방면으로 나아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붓의 땅, 북아프리카에 이민족들이 진출하다(명장 한니발의 등장)
고대 베르베르인들이 살던 이 지역에는 그 뒤 문명이 앞서갔던 아랍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속속 영입되기 시작한다. 주전 814년 튀니지에는 일찌감치 해상 항로를 개척한 두로와 시돈(페니키아) 사람들이 건너 왔고, 이들은 도시국가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600년 이상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다. 로마와 치열한 지중해 주도권을 다툰 명장 한니발(Hannibal, 주전 247?-183?)이 바로 카르타고의 명장이었다.
한니발은 한때 스페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점령한 후 알프스를 넘어 칸나 전투(주전 216년)에서 로마군을 대섬멸하였으며 로마의 턱밑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는 로마 전역을 대공포에 떨게 만든 최초의 이방 장군이었다.
하지만 로마 스키피오 장군과의 제2차 포에니 전쟁(주전 202년)에서 패한 후 두 나라는 평화조약을 맺고 휴전으로 들어갔다.
주전 196년 카르타고의 행정 장관으로 변신한 한니발은 재정 개혁을 통한 변혁을 시도하면서 로마에 보복할 기회를 노렸으나 한니발을 두려워한 로마의 계략에 포섭된 친로마파에 밀려나게 된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 밑으로 피신한 한니발은 이후 해전에서 로마에게 패한 후 소아시아 비티니아에서 자살로 한(恨) 많은 생을 마치게 된다. 결국 주전 264-146년에 걸친 세 차례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최종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카르타고 땅은 로마의 지배를 거쳐 주후 429년 스페인으로부터 침입한 게르만 혈통의 반달족이 바르바리를 약 1세기 동안 지배했으며, 533년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벨리사리우스가 반달족을 몰아내고 동부 바르바리에 제국을 재건했으나, 7세기 후반 다시 아랍인에게 정복당한다.
670년경 우크바 이븐 나피가 알카이라완(지금의 튀니지 카이루완)에 이슬람 국을 세운다. 바르바리는 900년까지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까지 베르베르 부족들은 대체로 독립을 지켜왔다. 그러나 11세기 아랍계 베두인족이 침입하여 농촌 경제를 파괴하자, 베르베르인들은 대부분 산악으로 피신하거나 유목민이 됐다.
이렇게 오랜 세기, 북서부 이집트에서 대서양까지 북아프리카 연안에 거주하던 붓의 초기 후손들(베르베르인들)은 카르타고를 세웠던 페니키아인, 지금의 리비아 키레네 지역으로 진출한 고대 그리스, 로마, 반달족과 알라니족, 비잔틴, 아랍인, 오스만 제국, 프랑스, 스페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지역으로 바뀌어 버렸다.
베르베르인들은 자기 땅에서 소수 민족이 되어버렸고, 일부는 베두인족이 유랑하던 사하라 사막이나 모로코 산악 지역 등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붓의 땅 북아프리카는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나라로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붓의 땅,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라틴 신학의 원조가 되다
은혜의 시대가 오며 이 붓의 땅 북아프리카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다. 같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신학의 중심이 된 반면, 붓의 땅은 라틴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이 철학적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이었던 반면, 라틴 교부들은 법률과 정치 등 사회과학적 배경을 가진 신학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헬라 교부들과 라틴교부들은 서로 다른 방면으로 기독교 신학에 공헌하게 된다.
다만 동방 헬라 교부였던 이레네우스는 서방(라틴)에서 사역을 하면서 라틴 신학의 파라도시스(paradosis, 전승) 사상을 통해 초기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흐름을 종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즉 기독교는 자칫 철학의 형이상학적 측면과 법적, 역사적 흐름 사이에서 혼동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레네우스의 전승 사상은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을 성령의 은혜로 일찌감치 극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한 셈이다. 그 만큼 초대 교부들의 신학은 그 개성이 강하였다.
카르타고 출신 터툴리안(Tertullian, 주후 약 160-225)은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라틴어로 삼위일체(Trinitatis)라는 용어를 최초 사용한 인물이었다.
신약과 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한 초기 이단자 마르키온에 대항해,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옹호한 사람도 터툴리안이었다.
성경의 자족성(自足性) 원리와 “아테네(헬라 철학)와 예루살렘(기독교)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는 유명한 말로, 기독교 신앙을 헬라의 당시 세속 철학과 분명하게 구분한 인물도 터툴리안이었다.
터툴리안의 이 같은 입장은 철학에 호감이 많았던 애굽 지역 알렉산드리아 중심으로 활약한 유대계 신학자들과 그의 신학적 색깔을 뚜렷하게 구별하게 만든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유명한 말을 한 신학자요 수사학자이자 카르타고의 주교였다가 순교한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와 인간 철학의 한계를 잘 알았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북아프리카 출신의 라틴 신학자였다.
무엇보다 북아프리카는 사도 바울 이후 등장한 기독교 역사 최고의 대신학자요 은총 박사(Doctor Gratiae)로 불리는 성 어거스틴(St. A. Augustine, 354-430)을 배출한 땅이었다.
그는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철학자이든 신학자이든, 개신교인이든 로마가톨릭 교인이든, 신앙과 교파에 상관없이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의 저서에 관심을 가질 만큼 그 영성의 폭을 가늠하기 힘든 천재의 모습으로 지금도 세상 모든 이들에게 신앙의 깊은 광맥을 제공한 인물이 되어 있다.
무엇보다 은총이 자유의지보다 선행한다는 그의 선행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 사상은 오늘날 교회 개혁 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이교도였던 그가 밀라노 정원을 거닐며 번민하다가 아이들이 “들어라, 읽어라(tolle, lege)”라고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로마서 13장 14절 말씀(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을 통해 극적 회심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모든 의심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오직 확신의 서광이 그의 가슴을 만져주었다. 주후 395년, 그는 자신의 고향 붓의 땅으로 돌아와 히포(지금의 알제리)의 주교가 되었다.
붓의 땅 히포(주후 393년 히포 회의 개최지)와 카르타고(주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 개최지)는 초대 세계 교회의 중심이었다.
카르타고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신약 성경 27권을 확정한 유서 깊은 땅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게 라틴 신학은 북아프리카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라틴 신학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붓의 후손들의 미래
한때 붓의 땅은 분명 교회와 신학의 영광의 땅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붓에 대해 그리 좋게 묘사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애굽과 곡에 대한 예언과 더불어 붓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겔 30:5; 38:5).
에스겔 선지자는 붓이 애굽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겔 30:5). 붓의 후손들을 몰아내고 아랍 민족이 장악한 북아프리카 땅은 지금 무슬림의 땅이 되었을 뿐 아니라, 리비아의 카다피 같은 독재자들로 인해 한동안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분명 붓의 땅은 초대교회와 신학의 중심지였다. 하나님은 이 ‘붓’의 땅에 다시금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애굽을 사랑하시듯(사 19:24-25), 북아프리카 땅도 당연히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북아프리카 땅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상한 심령을 위로하시며 눈물 닦아 주실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붓’의 땅이 초대교회 시절처럼 교회와 신학의 영광을 회복하는 부흥의 땅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전 김천대·안양대·평택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