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왜 능동적 순종을 믿어야 하는가? (7)
5. 교리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논쟁들
칭의와 의로움의 전가 교리는 낡은 신학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결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고문서에 담긴 불필요한 사색도 아니요, 도서관의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죽은 교리체계가 아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논쟁을 제기하는 주제다. 종교개혁 오백주년 기념대회가 전세계 곳곳에서 개최된 2017에도 칭의 교리와 구원론에 대하여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루터와 칼빈 이후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형벌적이고 대속적인 구속사역이라고 설명하여 왔다. 헤르만 바빙크는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오직 고난으로만 한정되기 때문에, 수동적 순종의 개념만을 수용하는 자들은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은 인간으로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완전한 순종의 열매이다.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1547)에서 칭의교리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함없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선행과 공로 사상에 근거하는 신인협력설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의 신학사상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칭의교리는 개혁주의 교회가 서느냐 무너지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체인 것이다.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들, 금욕주의자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중보사역에서 배제시켰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아직까지도 로마 가톨릭 신학과 알미니안주의를 붙들고 있는 공로주의와 자유의지를 근간으로 하는 자발적인 결단을 강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반대하였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취급하던 펠라기언주의가 부활하는 느낌이요, 알미니안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피스카토르 (Johannes Piscator, 1546-1625)가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반대하자, 프랑스 가프 총회에서 그의 견해를 거부했고, 제네바의 정통신학자 프랑소와 뛰르땡이 이를 철저히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청교도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히 반대했는데, 제임스 어셔 감독이 주도한 아일랜드 신앙고백서에서도 피스카토르의 견해를 배격했다.
파레우스 (David Pareus, 1548-1622)는 독일에 살던 개혁주의 신학자였으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근거로 하는 의로움의 전가를 반대했다. 그는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의 제자로, 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의로움의 전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사람의 의로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칭의의 전부는 죄의 사면일 뿐이라고 하였다.
돌트 총회에서도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거부하는 논쟁을 벌였다. 이들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다소 이견들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결국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의 전 생애 기간에 걸쳐서 한결같이 자원하는 심정으로 수행되었음을 드러내고자 사용한 것이며, 총체적으로 구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성취되었음을 강조했다.
17세기 초반에 등장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쏘씨니언들과 아미랄디언들은 행위언약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자리에서 각자 사람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결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동적 순종”에 대한 거부자들은 주로 현대 신약학자들의 대속교리에 대한 곡해에 기인하고 있다. 순종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적 형벌 당하심이라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풀이했다. 십가자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처참하게 제물로 바쳐진 대속적 형벌의 교리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도 역시 다른 속죄론들의 도전을 받았다. 수동적 순종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죄 없으신 어린 양이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켰다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죄인을 대신하여서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으심을 의미한다고 개혁주의 교회는 고백한다.
그러나 신학사에서 속죄론에 관련된 교리들의 논쟁을 살펴보면, 이미 수많은 변질과 가 있었다. 이레니우스와 동방교회의 재현설, 오리겐의 속전설, 안셈의 만족설, 아벨라르의 도덕적 감화설, 그로티우스의 도덕적 통치설 등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해석들이 있다. 이들은 심지어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온 인류의 죄를 덮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왜곡들로 인해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속죄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거부하게 되었다.
알미니안주의에 맞서서, 청교도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행위언약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그 내용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명쾌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단지 수동적 순종만을 삽입하려던 주장을 투표로 거부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어야만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에,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명시적으로 구체화하지 못했던 이유는 반율법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야할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탁월한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술들에서 능동적 순종의 교리에 대한 확고한 설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개발이 이뤄져서, “칭의론 논쟁”이 벌어졌는데 적어도 서로 다른 네 가지 신학적 관점들이 (진보적 개혁파, 로마 가톨릭, 신성화, 바울 신학의 새관점 등) 나와서 전통적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칭의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전가 받는다는 정통신학의 교리를 거부하는 “바울 신학의 새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코 건전한 성경적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속죄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자 정사와 권세에 대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라는 것을 신적인 속성으로 분류해서, 성도들에게 전가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서, 루터와 칼빈의 전통적인 개혁주의 칭의론과 전가 교리를 비판하는 소위 “바울신학에 대한 새관점”을 제기한 신약 학자들이 (N.T. Wright, James Dunn, E. P. Sanders, 등) 내놓은 연구들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의 피흘리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새관점”신학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하였다. 이들은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과 의로움의 전가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있으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믿음의 역동성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처럼 첨예한 논쟁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믿음으로 그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다시 조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