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으로 이 땅에 오셔서 30년 동안 부모와 형제를 섬기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년 동안 이 땅에 복음을 위하여 피, 눈물, 땀방울을 다 쏟으신 결과의 열매는, 십자가라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마지막 인간들이 가는 무덤까지 내려가신 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며,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후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전파한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와 왕 되심을 인정하는 곳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하신 말씀 중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에 주목해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완전하신 종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기꺼이 맡으셨습니다. 또한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도 부여하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 사명을 부탁하셨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흰 옷 입은 두 천사와 함께 승천하신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주님께서 올라가신 하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함께 기도하듯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고, 예수님께서 본래 계셨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 역시 시공간을 초월하신 곳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해 약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만을 의미하지 않고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육신을 지닌 제한된 모습으로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고, 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만나실 수 있게 된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은 넋을 잃고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놀란 나머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본 천사는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제한된 공간에서만 만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나아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고통 받으며 억눌리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선을 이루는 사람들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그 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실망과 좌절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줄 알았던 스승께서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 같아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같은 상황이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 땅끝까지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에게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는 우리 교회와 이 땅 교회들이 해야 할 사명이자 본분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철저하신 당부를 외면한 채 곁길로 가고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마치 승천하신 주님의 당부와 말씀이 그저 전설 같은 이야기로 들려지고 있지 않은지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다 쏟으신 그 주님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 고군분투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텐데, 시기와 질투, 그것도 모자라 이웃을 모함하면서 성도들을 내쫓는 신앙인들 때문에, 승천하시기 전 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이 지금도 가슴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산 증인들이지만, 그들조차 나중에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실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오늘 이 시대 신앙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라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 애매모호한 것은 절대 없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탐내지 말라, 그리고 사랑하라, 전도에 힘쓰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행동이 늘 일치했으며, 철저히 약속을 지키신 분이심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라면 어느 특정한 시간과 장소뿐 아니라 일상 속의 쉼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며, 언제 어디서라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5:17)”.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이 하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놀이 규칙은 한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은 춤을 추고, 한편이 슬피 울면 다른 편은 가슴을 치는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우한 코로나19로 인해 인류가 불행한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코로나19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과 성경 박사들, 그리고 목사들은 이를 방관만 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서서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결코 잘했다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고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라는 모르드개의 말처럼, 많은 지도자들은 이 때를 위해 당신을 준비하셨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적극 나서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핍박을 저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장서서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많은 병자를 고치시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시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하고 고통과 압제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은 이를 통해 멀리 더 멀리 열방을 향해 퍼져 나갔음을 믿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서로 사랑하는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