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사랑을 무너뜨리려 사랑을 이용하는 사탄
샬롬, 사랑의 편지를 오랜 기간 쉬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이 몇 분 계셨지만 잠시 멈춤은, 한 사람을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멈춤 그 자체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기간이 지나고 다시 사랑의 편지를 조금씩 보내려 합니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1.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마주침이 없는 시대에 그리움이 커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당연해지는 시대라고,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주함 대신 채워지는 그리움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은 결핍이 되어 채워야 하는 그리움도 더 커져만 갑니다.
그로 인해 온라인으로, 비대면으로 만나는 가운데 있지만, 마주침 없는 만남은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2. 아무 소리 없는 시대
그리움이 점점 커져가는 시대는, 마주침이 없는 마주함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마주침 없는 마주함의 시대’.
온라인 시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북적임도, 부딪침도 없어진 소리 없는 여기는 내면의 꽹과리보다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차 갑니다.
내면의 시끄러운 이기적 소음은 먼 곳에서 들리는 고통의 소리에는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덕분에 홍콩에서 들렸던 소리는 이제 사라졌고, 미얀마에서 들리는 고통의 소리는 바람에 스쳐 지나가며, 미국에서 들리는 아시아 차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혐오가 가득한 목소리만 들립니다.
3. 어쩌면 ‘마주침 없이 지냄’이 당연해진지 1년
아는 목사님의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1년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처음 갑니다. 구석에서 축하하면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갑니다.
만남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만남이 가능할까? 이곳에는 왜 이렇게 소리가 가득차 있을까? 이 소리는 왜 여기 모인 모두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일까?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평생을 살겠다는 약속이 있는 날인데, 가장 시끄러운 날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마주하겠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에, 수많은 마주침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담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하나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내는 사랑의 편지에, ‘보시기에 좋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주함에, 아니 우리의 그리움에 무얼 채워넣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4.
첫째, 좋은 만남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사람이 보기에도 좋은 만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사람 보기에 나쁠 리 없습니다.
둘째, 좋은 만남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만남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냥 여자를 만났을 때, 오히려 아담은 죄를 지었습니다. 마주함은 있었지만 그리움만 커져가는 마주함에는 생명의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빈 공간, 상처의 공간에 하나님을 채우고 나자, 여자의 이름이 하와 (Havvah)가 되었습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좋은 만남은 자기들끼리만 좋은 만남이 아닙니다. 둘의 만남을 통해 결국 주변에 생명의 소리가 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셋째, 좋은 만남은 한 사람을 위해 또 다른 사람과 바르게 이별할 줄 아는 삶입니다.
한 사람을 정해 결혼한다는 것은, 이전의 사람들과 바른 이별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무리 사랑하는 대상이 많아도, 그 마주함에 축복의 소리는 없습니다. 내면 가득히 욕망의 소리만 시끄러워질 뿐입니다.
바른 이별을 위해 손에 쥔 것을 놓는 사람만이, 한 손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만남은 그 사람의 양손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늘 양손만 붙들고 멈춰선 사람에게서는 아름다운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늘 제자리에 멈춰서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라 해도, 고이면 썩습니다. 아니, 사랑은 본디 흘러가야 합니다.
양손을 붙들고 마주보지 않음, 한손을 붙들고 한손을 비워둠은 그 사람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같은 방향을 보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무조건 “난 너의 전부이고, 넌 나의 전부”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목사의 아내가 되면 사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 목사님의 남편은 사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요,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서로 다름이 같음이 되지 않고, 서로 다름으로 하나됨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며 각자 맡겨진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5. 사탄도 방해합니다
어떻게 방해할까요? 역으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만남으로 유인합니다.
그 상태를 진단하는 건 더 쉽습니다. 점점 비밀만 많아집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보기에는 부끄러운 만남의 길로 인도하는 것 같지만, 서로에게만 달콤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마주함에는 신기하게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달콤하지만 외로워집니다.
둘째, 나쁜 만남은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죽음의 길이란 소리 없는 길입니다. 죽음 자체가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7장에 음녀에게 속은 젊은이가 걷는 길은 대로에서 점점 모퉁이로, 걸어갑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잠언 7:25-26)”.
셋째, 나쁜 만남은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 우리는 내가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손을 비우지 않으면,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어하는 사람의 삶은, 결국 그 만남 자체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나쁜 만남은 그 사람이 내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손 모두를 꽉 쥐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전부. 너도 나의 전부’.
달콤한 이야기지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여백을 두지 않고 내가 채우려하는 만남이 된다면, 결국 나에게는 그 ‘사람’만 남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에게 의존하고, 불완전한 나에게 의존하게 만든 관계는 언젠가 깨지는 소리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너만 보고 나만 보는’ 그 만남은 머물러 버리는 사랑에 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의 여백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또 다른 손을 비워둠으로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붙잡아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질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세상 사는 일은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 혼자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탄도 ‘만남’을 방해합니다. 바른 관계를 무너뜨리고, 바른 사랑을 어그러지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는 사탄의 전략에 속지 마세요.
평안한 5월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