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NEW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23)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와 바벨론의 함무라비,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다
아브라함,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 가족 매장지로 구입해
에서, 헷 족속 여성 2인과 결혼해 부모 이삭과 리브가 근심
여부스, 아모리, 히위, 기르가스, 아르왓 등 들어본 이름들
대제국 히타이트의 조상이 된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Heth)
성경의 헷(Heth)은 고대 히타이트족(Hittite)의 조상이 되었다. 히타이트족은 주전 2천년, 지금의 터키 땅 중심부에 강력한 아나톨리아 제국을 건설한다.
본래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주전 3천년 경부터 다양한 소왕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은 이들 소왕국들을 정복하면서 핫투사(Hattusa) 성에 도읍하였다(주전 1650년 경).
함의 후손 가운데 오직 헷 족속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다가 일찌감치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대제국을 이룬 것이다.
핫투사가 함락된 것이 주전 1190년이었으니, 주전 17세기부터 주전 12세기까지 히타이트 제국은 지금의 터키 중심부를 차지했던 왕국이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에서 발견된 공문서 보관처에서는 최소 5개 언어로 된 설형문자 서판들이 발견되었다. 이 제국의 영역이 대단히 광범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이들 언어의 어휘들은 인도·유럽어족 계열로 Mekki(많은), pada(발), 와타르(watar, 물), 파흐르(Pahhur, 불) 등 지금의 영어에까지 이들 어휘들이 그대로 연결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들의 신은 유럽 고대 신들처럼 판테온이었다. 1천명에 달하는 다양한 신들이 숭배되었다. 판테온의 남자 주신(主神)은 폭풍우 신이었고 여자 주신은 태양신이었다.
지금의 동서양 통로에 자리잡은 지리적 위치가 사방의 온갖 잡신 신앙들의 용광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헷 족속은 바벨탑 이후 노아 공동체와 이탈하며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헷 족속은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성경은 헷 족속과 헷 자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창 10:15; 23:3, 5, 7, 10, 16, 20; 25:10; 27:46; 49:32).
창세기 전반에 걸쳐 헷 족속이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 전후 이들 족속들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접촉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 이어진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가족 매장지로 구입한다(창 23장).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헷 족의 딸들과 혼인하였다.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장자인 에서는 헷 족의 두 여자(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와 결혼하여,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근심케 하였다(창 26:34; 27:46).
믿음의 여인 리브가는 야곱조차 헷 처녀들과 혼인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남편 이삭을 설득하여 아들 야곱을 외삼촌이 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함족 가나안 후손인 헷 족속과의 혼인에 대해 셈족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다윗과 솔로몬도 헷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다윗은 수하에 이방의 헷사람 아히멜렉(삼상 26:6)과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삼하 11장)를 두었다.
지연과 학연과 혈연에 매달린 우리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좀스러운 용병술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했다(행 13:22).
다윗은 자신의 충성스런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아들 솔로몬을 낳았다. 간음으로 인해 임신한 아이가 죽은 이후였다(삼하 12:15-23).
하나님은 이 같은 행위에 대해 다윗을 꾸짖는다. 성경은 예수님 족보에서 솔로몬의 어머니를 밧세바라 부르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 직설적으로 불렀다(마 1:6).
밧세바는 우리아처럼 헷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밧세바의 부친 이름은 엘리암(백성의 하나님, 삼하 11:3) 또는 암미엘(하나님은 나의 혈족이시다, 대상 3:5)이었다. 이들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밧세바의 조부는 다윗과 압살롬의 신하이며 고문이었던 아히도벨이었다(삼하 16:23; 23:34). 혹시 모친이나 조모 가운데 헷 사람이 있었을까? 유대 가문의 밧세바는 왜 이방 장수의 아내가 되었던 것일까? 성경은 침묵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여인으로 이방 우리아의 아내가 되었다는 점뿐이다. 솔로몬도 헷 사람과 혼인 동맹을 맺었고(왕상 11:1) 헷의 도시국가들과 무역을 하였다(왕상 10:29).
바벨론의 함무라비와 팔레스틴의 가나안 후손들
시돈과 헷을 제외한 가나안의 아홉 아들들 이름과 세거지(世居地)는 창세기 10장 15-19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나안의 아홉 아들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즈음 이미 그 땅에 정착하여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들의 조상들이 되어 있었다.
여부스(Jebusites) 족은 헷 족과 더불어 일찌감치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사사 시대에도 여부스는 여전히 지금의 예루살렘 주인이었다(사사기 19:10). 이렇게 다윗의 통치 이전 이스라엘 민족은 여부스 족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윗은 이곳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개칭한다(수 18:28; 삿 19:10; 대상 11:4; 삼하 5:6). 하지만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여부스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단을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Araunah)의 타작마당과 소 값으로 은 50세겔(약 570그램)을 주고 정식 구입한다(삼하 24:16-25; 대상 21:15, 18-28).
여부스 사람들은 솔로몬 시대에도 남아 왕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왕상 9:20-21). 그리고 훗날 이곳에는 성전이 세워졌다.
이 여부스 족의 도시가 바로 오늘날 인류 역사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모리(Amorites) 족은 가나안 땅의 가장 유명한 족속 중 하나였다. 때로 아모리 족은 가나안 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곤 했다.
팔레스틴 상황을 묘사한 주전 14세기 중엽 쓰여진 애굽에서 발견된 유명한 토판인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들 팔레스틴의 아모리족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겔 16:3)” 하여 아모리가 북방 헷과 대조되어 에스겔 선지자 당시 남쪽 수리아와 팔레스틴의 유력 족속이었음을 알려준다.
아모리 족의 번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부 아모리족은 주전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이주하여,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를 붕괴시키고 바벨론 지역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 아모리 족 출신의 가장 유명했던 통치자가 바로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주전 1792-1750년 경)이었다. 성경 창세기 등 토라에 등장하는 시혼, 옥, 마므레도 모두 아모리 족 출신의 통치자였다(창 14:13; 민 21:21; 신 31:4).
아모리 족의 바벨론 통치는 주전 1590년경 같은 가나안 후손인 히타이트 족이 바벨론 지역을 침략해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아모리 족은 소왕국 형태로 존속한다.
우리 한반도의 고조선이나 삼한의 100개에 달하는 부족국들, 그리고 가야 연맹은 통치자들의 이름이나 통치 연대가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다. 겨우 2천 년 전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아모리(아무루) 왕국은 주전 14세기부터 주전 13세기까지 통치자와 그 통치 연대가 남아있을 만큼 만만찮은 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주전 1천 년경 아람 족이 바벨론에 진출하면서 그 정치적 영향력이 막을 내리게 된다.
옥으로 대표되는 아모리 족은 키가 얼마나 컸던지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 나무 같았다(아 2:9)”고 묘사되고 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긴 아모리(아무리) 족은 창조주 하나님의 참된 경배를 방해하던 족속(수 24:15; 삿 6:10)이었다.
사울은 기브온 족으로 묘사된 이들 남은 아모리 족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다윗은 삼 년 기근이 오자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울과 피 흘린 그 집을 인함임을 알고 이 일에 대해 속죄하였다(삼하 21장).
성경의 헤스본이 중심 도시였던 이들 아모리 통치 지역은 이후 모압과 암몬이 각축을 벌였고 르우벤과 갓 지파가 정착하게 된다(민 32장, 수 13:15-28; 21:38-39; 대상 6:81).
기르가스(Girgasites) 족은 성경에서 늘 다른 가나안 후손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음이 확인된다(창 15:21; 대상 1:14; 느 9:78). 그들은 주로 트랜스 요르단이라 불려지는 요단강 동편 갈릴리 바다 근처에 살았다.
히위(Hivites) 족도 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주로 레바논 산지(삿 3:3)와 헤르몬 산맥(수 11:3)에 거주하였다.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하몰의 아들 세겜이 바로 히위 족이었다. 이들 히위 족속의 남자들은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인 시므온과 레위에게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기브온에 거주하던 히위인들은 멸망당하는 것이 두려워 속임수를 써 이스라엘의 종이 된 적이 있다(수 9장). 일부 히위 족들은 가나안 북부 여러 족속과 동맹을 맺었다가 메롬 물가에서 여호수아에게 진멸당하였다(수 11:3-5, 19).
알가(Arkites) 족은 시리아의 텔 알카(Tell Arqat) 성읍의 주인이었다. 이들 후손들은 놀랍게도 리비아의 트리폴리 북쪽 약 1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텔 아르카(Tell Arqah)의 옛 주민들에게서도 확인되고 있다.
같은 가나안 후손인 시돈의 페니키아가 해상으로 진출하면서 알가족의 일부도 이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이동한 시기는 여호수아 시대보다 한참 지난 이후였을 것이다.
아르왓(Arvadites) 족은 페니키아 영역 최북단 항구 도시인 아르밧에 거주하였다. 이곳은 키프로스 섬의 맞은 편 해안이었다. 이들은 두로 선박의 뱃사공으로 고용되거나 두로 부근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었다(겔 27:8, 11).
이스라엘과 페니키아 틈바구니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살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지배자들에 동화되었다.
스말(Zemarites) 족의 터전은 아르왓 남방 약 6마일에 위치한 오늘날의 숨라(Sumra)로 알려져 있으며, 이 성읍은 앗수르의 문헌들(앗카드어로 Simirra)과 아마르나 서신(Sumur)에서 언급되고 있다.
하맛(Hamathites) 족은 가나안 땅 북쪽에 자리하며, 다윗 시대부터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역사에 꾸준히 알린 민족이었다(암 6:14).
하맛은 다메섹에 종속되었다가(렘 49:23), 앗수르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점령당한 것으로 보인다(왕하 18:34; 19:13; 사 10:9; 36:19; 37:13; 암 6:2).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북방 하맛까지 이를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겔 47:16, 17; 48:1).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
전 김천대-안양대-평택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