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8] 아타나시우스 2: 이단의 술수와 반격
정통 vs 이단, 폭력과 무력, 보복과 유혈 폭동으로 점철
순수한 진리투쟁일까? 실리 챙기려는 권력 다툼일까?
교회, 밀라노 칙령 반세기만에 거대 권력집단으로 성장
아리우스주의 논쟁, 정치와 종교 뒤엉킨 중세의 예고편
아리우스(Arius)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재기를 꾀했다. 변방으로 추방된 뒤에도 감독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황제가 철학과 신학 논쟁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이며, 공의회 회원들이 오해했고, 정치적 패배였다고 변명했다.
니코메니아의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즉시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고 감독직을 맡았다. 아리우스주의를 추종하는 여러 명의 감독들이 복권되었다.
공의회가 끝난 지 채 3년을 넘기기도 전에 아리우스 사면 운동이 펼쳐졌다. 황제의 모후 헬레나와 이복 여동생 콘스탄티아는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이었다. 이들이 황제에게 아리우스주의 감독들의 복권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친척이라는 설과 황제의 친척 가운데 아리우스파 감독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 친척 감독은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리우스주의와 정통신앙의 기조가 다르지 않다고 황제에게 말해주었다. 아리우스파가 정통파의 중상모략을 받아 이단으로 정죄되었다고 설득했다. 아리우스를 직접 만나보면 황제가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아리우스는 아리우스파 감독들이 연대 서명한 사면 복권 탄원서를 여러 차례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신학 논쟁의 판도가 정통 신학으로 완전히 바뀐 상태에서, 견해를 달리하는 자에게 황제다운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탄원서를 받은 황제는 아리우스를 소환했다. 그를 사면, 복권시킬 예정이었다. 아리우스가 제국의 변방에서 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328년에 니코메디아로 돌아와 자세를 낮추고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아리우스는 교묘한 방법으로 명목상의 항복 신앙고백문을 황제에게 제출했다.
“우리는 전능한 성부,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성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 분은 성부로부터 가장 먼저 나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은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며 말씀입니다. …
우리가 보편 교회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심판 때 우리를 판결하실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인 교회로 돌아가 온 백성을 대신하여 폐하의 태평성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자비로운 폐하께서 바다처럼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아리우스의 신앙고백문은 아리우스주의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는 전능한 성부,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성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 분은 성부로부터 가장 먼저 나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은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며 말씀입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사(武士)가 미묘하지만 엄청난 신학적 차이를 지닌 그의 고백문의 그릇됨을 간파했을 리 없다. 황제는 아리우스를 사면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귀시키라고 명했다.
이단자들은 줄기차게 황제에게 자신들의 사면, 복권을 요청했다. 마침내 황제는 이단자들을 사면하고, 대감독에게 복권을 명했다. 이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단자들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황제에게 청원했고, 황제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시행했다. ‘황제기독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중도파 감독들은 이 점을 무시하고 황제 기독교 형성에 편승했다. 신학논쟁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던 유세비우스는 포용주의, 평화주의 태도를 취했다.
이 어용교회사가가 의장으로 활동한 안디옥교회 회의―총회(328-329)는 황제의 명을 따라 아리우스의 감독직 복권을 결의했다. 이단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중도파의 행보는 대부분 힘의 향배에 따라 움직이며, 포용주의, 평화주의를 지향한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가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바꾸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가 이집트로 복귀하면 격렬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신학충돌이 재연될 것이라 예측했다. 알렉산더는 황제의 요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는 주후 328년 세상을 떠났다.
박해 시대를 견뎌온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에 견주자면, 아타나시우스에게는 영향력, 유연성, 노련미가 부족했다. 동방교회 전체의 지지를 얻기에 역부족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 대감독 자리를 노리는 적수들은 ‘애송이’를 몰아내려고 아리우스파와 손을 잡았다.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월권행위를 하다가 파문당한 감독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지자들을 모아 분파를 형성하여 활동하다가,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보편교회 안으로 복귀했다.
이 그룹에 속한 감독 29명과 사제, 집사―부제들은 전임 대감독 알렉산더에게는 복종했지만, 젊은 신임 대감독 아타나시우스에게 순종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은 반기를 들었다.
아리우스파를 끌어들여 새 대감독을 축출하려고 대립 대감독을 선출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신성모독, 사기, 모함, 폭력, 고문, 강간, 살인 혐의가 있다고 하면서 고소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에 대한 혐의들이 모두 파렴치한 모함이라고 해명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신임 대감독의 결백을 충분히 이해했는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진실에 눈 감고 ‘카더라 방송’에 바짝 귀를 기울인다. 진실은 종종 가려내거나 해명하기 어려운 숲 속으로 숨어버려, 결국 오리무중이 된다.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혐의에 일일이 해명하는 것을 구차하게 생각하고 입을 다문다. 진실은 영영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매우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교활한 성직자는 타인의 도덕성을 건드리는 공격이 설사 실패하더라도 각인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한동안 꽤 쏠쏠한 효과를 본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이용한다. 허위사실 유포를 적수 타도의 무기로 이용한다.
4. 황제의 변심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문을 따라 예수를 믿는 정통파는 공의회 뒤에 소수파가 되었다.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정통파를 압박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의 생각은 바뀌기도 한다. 황제 주변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많았다. 로마 제국의 여름 황궁은 니코메디아에 있었다.
그곳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였다. 정치적 술수에 능한 이단자들은 치밀한 계획과 노련한 수완으로 황제와 황실의 환심을 샀다.
황제는 어느 시점에 신학충돌의 원인이 아리우스가 아니라 정통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진리 파수가 아니라 제국의 안정이다. 진리보다 백성들의 화합이 더 중요하다.
황제는 정통신앙 추종자들과 아타나시우스가 화합의 최대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배타적인 정통신앙 추종자들을 차례차례 추방했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에게 “교회에 오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운 견해를 허용하라. 어떤 신학적 주장을 금지하거나 배척하는 대감독은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황제의 소환을 받고 갓 문을 연 계획도시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진리를 변호했다. 1년 넘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자리를 비웠다.
황제는 재위 30년을 앞두고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리스도의 무덤 터에 웅장한 성전을 지어 축성식을 하려고 감독들을 초청했다.
초대받은 감독들은 예루살렘 길목 티루스에서 교회회의―총회(335년 7월 11일)를 열었다. 중도파의 수장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가 이를 주도했다. 아리우스파의 대변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직을 노리는 멜레티우사파 추종자들이 설쳐댔다.
총회는 ‘애송이’ 아타나시우스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해묵은 죄목들을 들고 나왔고, 신성모독 혐의를 입증할 조사단을 구성했다. 아타나시우스가 궐석한 상태에서, 티루르 총회는 그의 대감독직 해임을 결정했다.
티루스 총회는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회무(335년 9월 17일)를 계속했다. 아리우스는 황제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황제가 이 회의에 임석하고 있었다.
총회는 아타나시우스 추방 선고를 내린 반면 아리우스를 받아들였다. 그의 신앙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아리우스는 화평주의 태도를 지닌 중도파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아리우스주의는 동방교회 안에서 ‘정통 신앙’ 지위를 차지했다.
신학 논쟁에서 중도파는 언제나 화평주의 태도를 보이며 사안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아리우스주의 이단이 정통 신앙으로 바뀐 것은 진리에는 관심 없고 평화공존을 지향했던 중도파의 정치적 성향의 결과이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아타나시우스 해임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집단적으로 그의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자 적수들은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거짓 소문을 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콘스탄니노플로 가는 곡물을 선적하지 못하도록 그가 항구 노동자들을 부추겨 파업을 획책했다고 꾸며댔다.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분노했다. 아타나시우스를 즉각 추방하라고 했다.
대감독은 머나먼 서쪽 변두리 지역 트리어(Trier)로 유배(335)되었다.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에 가까운 독일 라인란트팔츠 지방의 자그마한 도시였다. 그는 약 2년 동안 아름다운 강변과 포도밭을 끼고 있는 곳에서 첫 번째 유배생활을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배지에서 서방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사귀고 신학을 함께 논의했다. 동방 교회가 아리우스주의에 기울어졌을 때 서방 교회는 정통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동지들을 만나 의기투합하며 미래를 대비했다.
황제는 사면복권된 아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황궁에 초대하여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아리우스는 옷소매 안에 자신의 진심이 담긴 아리우스주의 신앙고백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신앙고백서를 바라보면서 니케아 공의회의 주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옷소매 안에 있는 그것의 내용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우스는 교묘한 속임수로 황제를 기만했다.
아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아이린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자신의 사면과 복권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승리를 만방에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의기양양하던 아리우스는 갑자기 복통 설사를 하고 사경을 헤매다 80세의 나이로 336년에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정통 신앙과 이단이 서로를 포용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랐다.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중도파는 황제의 뜻에 따라 연합, 일치, 화평을 추구했다.
중도파는 대부분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성향을 지닌다. 중도파는 사실상 교회를 이전투구의 진흙탕으로 만든다.
황제와 중도파가 의도하고 기대한 것과는 달리, 정통 신앙과 아리우스주의의 신학충돌은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에 휘둘렸다.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증오, 인신공격, 중상모략, 욕설, 폭력 마당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의 대감독직 복귀를 탄원했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도 대감독 구원에 나섰다. 무죄를 호소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 아타나시우스가 오만불손하며, 불화, 갈등, 폭동의 주동자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신에 힘입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을 통일시켰다. 그러나 예수신앙 공동체 구성원이 되는 필수조건인 세례를 받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이 기독인임을 떳떳하게 선언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337) 아리우스주의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죽음을 예감하고, 그 지역 니코메니아의 감독 유세비우스를 불렀다. 콘스탄티누스가 진정한 기독인이었는지, 기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했는지, 정치적 의도로 세례의식을 미루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세례를 받은 황제이다.
5. 아타나시우스의 활약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그의 세 아들들이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세 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재위 337-340)는 브리타니아와 스페인을 포함한 제국의 서부 지역을 맡았다. 그는 정통 신앙 지지자였다.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 지역을 차지했다. 막내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제국의 중심부인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북부를 통치했다. 그는 정통 신앙을 지지했다.
정통과 이단의 향배는 통치자들의 종교 성향에 따라 바뀌었다. 정치권력에 의존하는 교회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불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부 지역의 새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장남)는 유배생활을 하는 아타나시우스를 접견하고 그의 결백과 용기를 치하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동부 지역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차남)는 맏형의 요청에 따라 그의 귀환을 승인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타나시우스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는 거칠게 공격했다. 온갖 혐의를 들춰냈다. 공금횡령과 과부 구호기금을 유용한 혐의가 있으며, 대감독직 복귀 자체가 불법이라고 했다.
티루스 총회(335)의 판결을 뒤집는 새로운 총회가 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동자는 동부 지역 새 황제의 신뢰를 확보한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 반대파는 피스투스를 대립 대감독으로 내세웠다. 두 명의 알렉산드리아 대감독이 등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교회 회의―총회(338년)를 소집하고 이집트 전역의 감독 약 100명을 모았다. 자신을 파면한 티루스총회의 판결이 무효라고 결의, 선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총회 결과를 로마 감독에게 알리려고 대사 두 명을 파견했다. 이는 교황 제도가 정착되기 전에도 로마의 감독이 상당한 영향력과 지위를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카파도키아에 머무는 동방 황제를 찾아갔다. 그러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차남)는 안디옥교회 회의―총회(339)를 소집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대립되는 두 명의 대감독을 물러나게 하고, 카파도키아 출신 그레고리우스를 새 대감독으로 세웠다. 그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황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자신이 세운 새 대감독의 활동을 지원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진수는 인간 역사 안에 사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생한 성육신이었다.
성육신을 우주의 황제께서 인간의 도시를 방문하여 그 가운데 어느 집에서 산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했다. 이 예수를 통해 인간은 사탄의 공격과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가 기독교의 진수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성육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막에서 은자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사들에게, 아리우스의 주장은 끔찍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타나시우스가 교회당에서 세례를 베푸는 동안, 군사들이 자기를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보낸 군사들은 그레고리우스를 앞세우고 교회당을 불태우고 도시를 약탈했다. 도시는 신음과 비명과 한숨으로 가득 찼다. 처녀들은 발가벗긴 채 능욕을 당했고, 수도사들은 짓밟혀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창검에 찔렸고, 곤봉에 맞아 울부짖었다.
극적으로 피신한 아타나시우스는 한 달 가량 그 도시 안에서 은신하면서 참혹한 비극을 지켜보았다. 이후 로마로 도피하여 7년 동안 긴 망명 시간을 보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3년 뒤, 맏아들이 막내동생에게 싸움을 걸었다. 방어하던 막내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맏아들을 살해했다. 제국 영토는 둘로 개편되었다. 영토 3분의 2는 콘스탄스(막내)가 통치했다.
콘스탄스는 망명 온 정통파 감독들을 지원했다. 로마의 감독 율리우스 1세도 아타나시우스를 환영했다.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총회(341)는 니케아 신조를 정통 교리로 재천명했다.
아타나시우스 지지를 선언하고, 그레고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 교구 대감독직을 찬탈한 자로 규정했다. 서방 교회에는 니케아 신앙이 자리를 잡았다.
한편 동방교회 안에는 아리우스파가 대세였다.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차남)는 아리우스주의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대감독직에 임명했다.
신임 대감독은 정통파 탄압을 주도했다. 안디옥교회 회의―총회(341)를 열고 2년 전에 결정한 아타나시우스 면직의 정당성과 유효성을 재확인했다.
동·서방교회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될 무렵, 불화를 해결할 목적으로 사르디카교회 회의―총회(343)가 개최되었다. 동방교회 대표 76명, 서방교회 대표 94명이 참석했다. 아타나시우스도 참석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동방 교회 감독들은 아타나시우스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회의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별도의 교회회의―총회를 개최했다. 동·서방 교회는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했다. 아타나시우스의 복직에도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
서방 황제 콘스탄스(막내)는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차남)에게 아타나시우스의 복직을 단호하게 요구했다. 거절하면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정통 신앙의 변호인 아타나시우스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힘에 밀리던 동방 황제는 숙고 끝에 아타나시우스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동방 황제의 초대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머뭇거리는 객기를 보이다가, 마침내 귀국 길에 올랐다. 개선장군처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대감독직에 복귀(345)했다. 아리우스파 대감독 그레고리우스가 숨진 직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때로부터 약 10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아타나시우스는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혼신을 쏟아 형제 사랑과 나눔 정신을 회복했다. 때마침 불어온 고행 실천과 금욕 문화가 그곳에 확산되었다. 신자들은 기도에 전념하고, 절제하며, 수도생활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적극적 지지자인 황제 콘스탄스는 장수들의 모반으로 허망하게 죽었다.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인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모반자들을 축출하고 제국을 하나로 통일했다.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교회당에서 초조하게 전투 소식을 기다렸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황제를 위로하고 마음을 사로잡으려 빈틈없는 계책을 세웠다. 아리우스주의 감독은 황제에게 승전보를 전해주었다. 전쟁의 승리를 감독 자신의 기도 덕분이라고 꾸며댔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가 모반자들이 파송한 사절들을 접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사실이 아니며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모함이며 날조라고 해명했다.
아타나시우스의 강력한 보호자 콘스탄스가 죽었고, 자기에게 원한을 가진 콘스탄티우스가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직 수행이 어려운 상태로 접어들었다.
천하를 통일시킨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가 대세인 동방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재편하려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타나시우스였다. 황제는 지금의 세르비아 지역 시르미움에서 교회회의(351)를 소집하고, 아리우스주의자인 카파도키아의 게오르기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으로 세웠다.
민중의 추앙을 받는 교회 지도자를 자신이 직접 제거하면 폭군이라는 비난이 따를 것을 고려하여 편리한 수단인 교회회의―총회를 이용했다. 두 명의 대감독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그 무렵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황제가 아리우스파를 위해 건축한 예배당을, 승인도 받지 않고 사용(355)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좁은 교회당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어쩔 수 없이 큰 교회당을 사용했다고 변명했다. 자신의 행위가 위법인 줄 알면서 그랬노라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는 황제의 의도에 도전했다. 자신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황제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화려하고 웅장한 새 교회당이 아리우스주의의 본거지가 됨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객기를 부린 것인지, 정치 권력자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였는지, 황제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축출하려고 교회회의―총회를 여러 차례 소집했다. 밀라노에서 열린 총회(355)에는 동방과 서방의 감독 300여 명이 참석했다.
황제는 자기의 뜻에 협조하겠다는 감독들에게 선물을 주고 특전을 베풀었다. 순수한 감독들은 이에 분개하여 맞섰다. 그러나 정의를 외치는 자는 소수였고, 항의하는 감독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회유, 협박, 매수, 보복, 음모, 정치공작이 난무했다.
정통 신앙에 충실한 감독들은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유죄판결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타나시우스 파면 결의에 서명을 거부한 감독들은 결국 제국의 변방으로 분산 유배되었다.
불의와 권모와 술수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주 같은 보배들을 드러나게 한다. 무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에 부상시킨다.
유배를 자청한 감독들은 아타나시우스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 밀라노 감독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코르도바, 트리어, 베르첼리, 칼리아리 감독들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첫 번째 유배지에서 사귀고 의기투합한 자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진리 파수라면 어떤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 추방을 선고하고 실행을 명했다. 그를 체포하려고 대규모의 병사들을 보냈다. 아타나시우스가 신자들과 함께 심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 5천 명이 그를 붙잡으려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의 도움으로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교회당을 둘러싸고 있는 군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같은 양상의 충돌이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에서도 벌어졌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죽자, 대감독 자리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쟁투가 벌어졌다.
로마의 대감독직은 정통파 인물이 일관되게 맡아 왔다. 시민들의 유혈폭동 덕택이었다. 황제는 정통파 인물을 축출하려고 군대를 동원했고, 정통파 지지자들은 폭동으로 맞섰다.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를 대감독으로 인정한다는 조정안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로마 시민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항의했다. 거리로 몰려나가 폭동을 일으켰다. 황제는 백성들의 폭동에 심약했다. 로마 시민들의 요구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통과 이단 충돌은 폭력과 무력, 보복과 유혈 폭동으로 점철되었다. 기독론을 둘러싸고 전개된 교회의 내분과 제국의 갈등은 과연 순수한 진리 투쟁이었을까? 실리를 챙기려는 권력 다툼은 아니었을까?
교회는 엄청난 이권과 사법권을 지니고 있었다. 막대한 재정을 주물렀다. 국가의 복지 행정을 맡아 관장하는 특권을 누렸다. 교회는 무료 장례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기증받은 현물이나 헌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중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뇌물과 비자금이 오가고,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성직자들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이집트 행정 관리들이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지 못하고 황제가 군대를 동원한 것을 보면, 감독직이 제국의 권력 서열에서 고위직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밀라노 칙령(313)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교회는 황제도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성장했다.
정통파는 이단을 막을 목적으로, 아리우스파는 교회와 교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정치 권력과 손을 잡았다. 아리우스주의 논쟁은 정치와 종교가 뒤엉킨 쌍두마차 시대―서양 중세사의 예고편이었다. (계속)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3장 2부 중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