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9] 아타나시우스 3: 월계관
거짓과 뒤섞여버린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주 버리고 조개껍데기 모아 공존 도모해선 안돼
교회, 혼합적 연합이나 일치 위에 세워질 수 없어
기독교 위협 방관하거나 신학논쟁 피하면 비겁자
6. 사막의 수도사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가까운 사막에는 마귀, 맹수, 도둑이 들끓었다. 기도와 관상에 몰두하는 수도사들은 가혹한 자기 절제와 금욕생활로 영적인 순수함과 완덕을 추구했다. 자신의 내면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칩거, 독거하면서 영적인 행복을 추구한 안토니우스뿐 아니라 수도공동체를 창설한 파코미우스와 교분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들은 정통 신앙을 지지했다. 아타나시우스는 황제가 파송한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빠져나와 사막에 피신했다.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의 제자들이 극진히 호위하고 섬겼을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들은 로마 제국의 백성이었지만, 군주의 법보다 신앙양심과 하나님의 법을 우선시했다. 가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자들은 아타나시우스를 6년 동안 보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엄격한 수도 규율을 따르는 수도사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금욕과 절제로 일관된 사막 생활에 익숙해 졌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살해하라고 명했다. “해충 같은 자, 죄를 짓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자, 열 번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자”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에게 맞섰다. 황제와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를 빌라도보다 더 사악한 폭군이며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글을 은밀히 유포했다.
변장을 하고 도시에 잠입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이단 격퇴를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시기에 아리우스주의의 위험과 오류를 알리는 여러 가지 글들을 남겼다.
그 무렵, 아타나시우스는 베스트셀러 『안토니우스의 생애(357)』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집트 밖에 사는 수도사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시작하여, 안토니우스의 생애와 수도생활을 소개한다.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려 아리우스파를 논박한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기는 이교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 책은 세상이 사막을 주목하게 했다. 수도사 신드롬을 일으켰다. 수십 년 뒤 어거스틴의 회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361년 마흔 셋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치세 동안 아리우스파가 크게 득세했고, 정통신앙은 뿌리를 깊이 내렸다. 새 황제 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훈육을 받고 자랐다.
새 황제는 종교평등주의자였다. 황제위에 오른 즉시 모든 종교들의 활동을 허용했다. 정통파와 아리우스파를 가리지 않았다. 이교의 신들과 로마의 전통 종교의 활동을 허용했다.
몰수한 전통 종교집단들의 토지와 신전을 돌려주었다. 도시마다 제사장과 사제를 임명했다.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거행했다.
종교평등 정책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기득권 박탈을 의미했다. 제국이 기독교에 제공한 특전들과 혜택들은 모두 폐지되었다. 성직자와 교회재산에 대한 면세제도가 취소되었다. 국고로 지어주던 교회당 건축이 중단되었다.
역사가들은 황제 율리아누스를 ‘배교자’로 일컫는다. 황제가 종교평등주의 정책을 편 까닭이 철학적 소신 때문이었는지, 교리를 빙자한 기독교인들의 광기어린 폭력, 대립, 갈등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인지, 또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타나시우스가 사막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직은 카파도키아 출신이며 아리우스주의자인 게오르기우스가 맡고 있었다.
그는 잔학하고 탐욕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사악하고 비열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황제의 힘을 배경삼아 이교도 신전을 약탈하고, 멋대로 세금을 매겼다. 소금, 종이, 장례필수품 등의 유통 과정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거래를 독점하여 시민들과 상인들의 반감을 샀다.
분노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황제의 군대가 폭도들을 진압했다. 대감독은 3년 넘게 피신했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새 황제의 즉위 소식이 전해지자 이교도들과 성난 군중은 대감독을 체포, 감금, 살해했다.
새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에 관대했다. 종교평등정책에 걸맞는 파당적 싸움 때문에 쫓겨나거나 도피한 모든 감독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황제의 정책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는 6년 동안의 도피와 은거를 끝내고 362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교회는 처참한 상태였다. 아리우스파 감독이 지도하는 동안 정통 신앙은 사실상 폐기되고, 아리우스주의가 기독교의 주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성부가 성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고 있었다.
니케아 신경의 핵심인 동일본질(homoousios)과 이를 보완하는 개념인 유사본질(homoiousios)이라는 용어들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한 아타나시우스는 곧장 알렉산드리아교회회의―총회(362)를 소집하고 정통신앙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총회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ousia)으로는 같다는 정통신앙 공식을 재차 확인했다.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실체(hypostasis)는 다르다는 개념을 정식화했다.
성부와 성자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하는 이 역설적 개념은 그 뒤에 전개된 기독론과 삼위일체 신론 이해에 필요한 열쇠이다.
황제 율리아누스는 아타나시우스의 활동에 불만을 품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는 것은 허용했지만 대감독직에 복귀시킨 적이 없음을 핑계 삼아 추방령을 내렸다.
과거 거듭된 판결로 단죄를 받은 죄인이 감히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대감독직을 수행함은 황제의 법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아타나시우스가 대감독직에 복귀하여 8개월 동안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황제는 이집트 총독에게 추방 집행을 독촉했다. 군사들이 아타나시우스를 잡으려고 사방을 뒤졌다.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62년에 네 번째 도피의 길에 들어섰다. 이집트 사막으로 몸을 숨기려고 작은 배에 올라 나일 강을 거슬러 남하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따라왔다. 군선이 빠른 속력으로 뒤쫓아왔다. 추격자들과 아타나시우스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군선 지휘관은 배의 고물에 앉아있는 아타나시우스를 향하여 소리쳤다.
“여봐라, 아타나시우스란 자를 보았느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타나시우스가 답했다. “예 보았습니다. 그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두르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군선은 힘차게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고, 아타나시우스 일행은 수도사들이 있는 사막으로 피신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당당한 아타나시우스의 나이는 일흔에 가까웠다.
7. 월계관
황제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 중 전사했다. 재위 20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후임 황제 요비아누스(재위 363-364)는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고 전선에서 철수했다.
그는 전임 황제의 종교정책을 백지화했다. 기독교의 법적 권한을 보장하는 법령들을 잇따라 공표했다.
율리아누스의 종교정책과 새 황제의 종교정책은 정치권력에 편승하여 세력을 키워오던 아리우스주의에게 치명타였다. 황제의 관심을 끌려 노력하고 상대를 물리치려 정치적 술수를 동원한 아리우스파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새 황제의 종교정책이 바뀌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성직자들을 만났다. 곧장 새 황제를 만나려고 배편으로 황제가 머무는 헤에라폴리스로 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정확한 판단, 신속한 결단, 민첩하고 과감한 행동,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위기관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돌아올 때가지 기다리는 동안, 아리우스파가 무슨 수작을 부려 상황을 악화시킬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황제 요비아누스는 아타나시우스를 합법적인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대감독으로 승인했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에게 귀국을 보장하는 서한을 써주었다. 황제의 서한은 아타나시우스가 박해자들의 위협과 고난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협박과 위험을 티끌처럼 가볍게 여겼고, 정통 신앙의 키를 굳게 붙잡고 지금까지 진리를 위해 투쟁한 것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리우스파는 뒤늦게 황제를 만나 자파의 인물을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여러 차례 그들의 간청을 물리쳤다.
새 황제는 전임 황제 때 피폐해진 기독교의 입지를 되살리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다 제국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서 과식과 과음으로 숨졌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잠시 황제가 되었다가, 발렌스(재위 364-378)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새 황제는 아리우스파 감독이 베푸는 세례를 받고, 정통파 감독들을 추방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다섯 번째 도피(365)의 길에 들어섰다. 복귀한지 1년 7개월 만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의 대감독직 복귀를 간청했다. 사태가 폭동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이자 황제는 마지못해 아타나시우스가 교회를 이끌도록 허락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66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대감독직을 수행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마지막 도피생활을 마치고, 일흔 다섯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감독직을 맡았다. 정통 신앙이 교회 안에 자리잡도록 했다. 한 세기에 걸친 정통과 이단 투쟁 끝에 정통신앙이 월계관을 썼다.
이 월계관은 신학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이단에 맞선 아타나시우스의 노력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아타나시우스 이후, 정통 신앙의 수호자 역할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맡았다. 바질과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바질의 학우(學友)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기독론을 바탕삼아 삼위일체 신론 정의에 이바지했다.
새 황제로 등극(379)한 데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다른 종교들을 사교(邪敎)로 규정했다. 모든 감독들에게 니케아 정통신앙을 고백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신학논쟁을 종결시키고 정통신앙에 최후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또 정통파 신학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대감독으로 임명했다. 이곳은 오랫동안 아리우스파가 장악해 오던 자리였다.
아리우스주의의 생명은 이 시기에 사실상 종식되었다. 성자는 성부와 상이본질이며 만물의 으뜸 피조물이라는 교리의 흔적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 그룹 안에 남아있다.
황제는 아리우스주의 논쟁을 공의회의 권위로 결말지으려고 두 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지 56년 만에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아이린 교회당에서 열렸다. 하기아소피아 교회당 가까이에 있는 이 교회당은 지금도 화려한 유적지로 남아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할 목적으로 소집되었다.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았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본질이 같다”는 니케아 신경을 고스란히 옮기고 성부와 성자를 대등한 존재로 본다.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야기된 사안들을 다루어 옛 신조문을 보충 확대했다. 이러한 까닭에 이 공의회 신조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 일컬어진다.
맺음말: 권면
아타나시우스는 진리가 위협당하는 시대의 한복판을 헤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백절불굴의 강인한 의지와 분투 노력으로 격렬한 신학 논쟁을 치르고 정통신앙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학 논쟁은 때론 끔직한 고통을 수반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감내했다. 그는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의미와 고통을 이겨낸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서신을 남겼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수가 우리를 괴롭힐 때 오히려 고통 속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롬 5:3)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 부르시는 상(빌 3:14)’을 받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욕을 받았을 때 성내지 않고, 오히려 때리는 사람에게 뺨을 내밀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 우리는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깁니다(야 1:2-3).’”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신뢰와 존경은 어디에서 왔을까? 몸에 배인 수도사와 같은 청렴성, 엄격한 자기 절제, 금욕적인 삶, 위기관리 능력, 인문지식, 결기, 민첩한 판단력, 진리와 정통신앙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확신과 열정이 그에 대한 존경을 자아냈다.
그는 교회가 부닥친 현실 타개에 주력했다. 신학충돌을 회피하지 않았다. 진리 쟁투에서 타협하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정치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교회 일에 간섭하는 황제에게도 도전했다.
아타나시우스에게는 성인 열전에 나옴직한 기적 이야기가 없다. 기도로 병자를 치유하고, 신비를 체험하고, 외국어가 아닌 방언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당대 최고의 영성을 지닌 실천적 목회자,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인간적인 결함이 없었을까? 그의 행보는 때로 권력 지향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행정질서를 무시하기도 했다.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과 손을 잡았다. 황제의 권력에 맞서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했다.
세속 권력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아타나시우스의 과오는 정통신앙의 수호자라는 상찬(賞讚)에 파묻혀 버렸다.
자유주의 신학자, 에큐메니칼 신학자의 눈으로 보면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이 믿는 것 외에는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흑백논리의 소유자였다. 편협한 정통신학의 굴레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였다.
신학적 다양성과 평화공존을 거부하는 배타적 독선주의자였다. 상반된 신학 주지들을 용광로에 넣어 녹여내고 교회를 일치시킬 수 있는 통 큰 인물이기는커녕, 종교다원주의,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거부한 속 좁은 정통주의 신학자였다. 화해와 일치의 장애물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포용적인 자세로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 황제의 요구를 따라 아리우스주의를 적절히 수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안락하게 살고, 아마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사막의 황량한 풍토만큼이나 거칠고 메마르고 삭막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왜 고난의 삶과 투쟁의 길을 선택했을까?
거짓과 뒤섞인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이다. 진주를 버리고 조개껍데기들을 모아 평화공존을 도모하려는 발상은 진리를 망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한 연합이나 일치의 터 위에 세워질 수 없다. 기독교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상 침입을 방관하거나 신학논쟁, 신학충돌을 피하는 자는 비겁자다.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3장 3부 중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