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 (5) 정부의 집회 제한 및 대면예배 금지 조치
본지는 지난 5월 24일 한국기독교학술원 제57회 세미나에서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발표한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를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초기 선교사들, 복음만 전하겠다며 정교분리 내세워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정부에 순응 자처한 결과로
일제 조선총독부, 정교분리 내세워 선교사 활동 제한
신사참배, 권력의 교회 탄압이자 정교분리 원칙 위반
3. 국가와 교회: 국가기관의 종교 집회 제한은 정당한가?
4) 한국에서의 정교분리론
미국 연방헌법은 현행 성문법 중 가장 역사가 오랜 문서로, 정교분리 조항 등은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18세기 말부터 북미에서부터 유럽 국가들도 정교분리를 법제화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상당수 비서구 국가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우리나라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정교분리가 명문화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하여 국교의 부정과 정교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정교분리론은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의심하던 조선 정부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조선의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하겠다는 점에서 정교분리를 제시한 것이다.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교분리라는 의미를 국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여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정교분리의 근본 정신은 그 이후에도 곡해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총독부는 정교분리론을 앞세워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했다. 정교분리의 근본 정신은 국가 권력의 교회 간섭을 금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것으로 호도하여 외국 선교사들이나 조선인들의 정치 관여를 금기시 한 것이다.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정교분리론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과 같은 반일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국가 권력의 신교(信敎)의 자유 부정과 교회 탄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국가권력의 교회 탄압이자 정교분리 원칙의 심각한 위반이었다. 국가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점차 저항은 약화되었고 후에는 심각한 훼절에 이르게 되지만, 이 일로 2천여 명이 투옥되고 40여 명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이른바 일제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에 저항한 것이며, 신교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1939년 8월 일제경찰이 그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설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
비록 짧은 응대였으나 국가권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국가 권력은 신교의 자유, 곧 설교권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국가 권력자들은 정교분리를 교회의 정치 불관여로 간주하여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서 말한 정교분리의 의미는 국가권력의 종교자유 침해 금지를 규정한 것이다.
이상규 박사
백석대 신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