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10] 왈도파 1-1: 탁발 수도 운동
로마 교회, 왈도와 왈도파 이단으로 단죄한 이유
왈도파 장점들이 기존 교회 문제점 드러냈기 때문
체제 붕괴 위기 가져오고 기득권 유지 구도 위협
로마가톨릭교회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6월 22일 12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의 왈도파 교회를 찾았다. 교회의 무자비한 핍박을 받은 자들의 후손들에게나마 용서를 구할 목적이었다.
교황은 로마 교회가 피터 왈도(Waldo of Lyons, 1140-1205)와 왈도파 신앙인들을 이단자로 정죄하고 괴롭히고 처형한 과거사를 사과했다. 교회가 행한 비기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태도와 행위 그리고 부당한 처사에 유감을 표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에 따라 경건하게 살면서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을 했다. 로마교회에 대한 저항이나 반대운동을 하지 않았다. 분파주의 운동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왈도와 왈도파 신앙인들을 가장 위협적인 이단으로 여겨 혐오했다.
서양의 중세는 가난한 시대였다. 서민 대중은 허기진 배를 거머쥐고 살았다. 봉건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노예처럼 살게 했다. 도시의 활발한 교역과 화폐경제의 발달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빈부의 격차를 증대시켰다.
권세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했다. 행패를 부렸다. 사회정의와 도덕성의 불꽃 심지는 극도로 낮았다. 유럽의 종교―기독교는 자기 시대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각을 가진 자들은 교회가 영적 대책을 세워야 함을 깊이 인식했다.
그 무렵 등장한 왈도와 그 추종자들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찾으려 했다. 재산과 명예를 포기하고 걸식(乞食)하며 유럽 전역으로 다니며 복음 진리를 설교했다.
그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노동을 제공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가난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가르쳐주었다. 가난한 자로 살면서, 복음서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사도적인 청빈의 삶을 살도록 권장했다.
왜 교회는 왈도와 왈도파를 적대시하고 이단이라 단죄했는가? 왈도파 신앙운동의 장점들이 기존 교회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체제 붕괴의 위기를 가져와서 기득권 유지 구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의 교회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생명력이 없었고, 복음서에 부합하는 경건을 상실했다.
당시의 교회에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적 설교가 없었다. 반면, 교회는 정치권력과 성례의식, 그리고 미신적 교리에 집착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던 때, 성직자들은 사치와 방종에 빠져 시대의 요청에 역행하고 있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보여준 모습과 달랐다. 교회는 의무감 때문에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받아주었지만, 왈도파는 찾아가서 설교-복음 전도를 하고 죄 고백을 들어주었다. 성직자들보다 더 경건하게 살았고,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성인 숭배, 성직 제도, 성례 집행과 관련된 배타적인 태도, 감독의 배타적 사도권 주장,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성직자들의 부패, 탐욕, 말씀 빈곤 등 로마교회의 모순들을 지적하고 그것들에 항거했다.
1. 탁발 수도 운동
서방교회의 십자군 원정이 가져다 준 진취적인 분위기는 부패한 권력자들, 교황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경건한 신자들의 맥박을 고동치게 했다. 서양 세계는 11세기 말부터 긴 지적 동면에서 깨어났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독특한 형태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단순한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을 했다. 바로 탁발 수도사들의 등장이다. 탁발(托鉢)이란 수도사나 승려가 경문(經文)을 외우면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함을 뜻한다.
탁발 전도자들의 등장과 이들이 보여준 복음전도의 열성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과 성직자들의 사리사욕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절대 다수인 시대에 거대한 부(富)를 소유했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성직자들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풍토에서 창의적 신앙의 표현들이 만개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걸맞는 형태의 수도 운동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이들을 주목하고 추종했다.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 흐름에 이단 사조들까지 끼어들어 덩달아 기승을 부렸다.
교회의 변두리에는 복음전도와 수도사적 이상을 가진 기독인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설교와 복음전도로 이단자들을 깨우쳐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어 숲 속, 여울목, 강가에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여행객들을 도울 수 있는 곳에 살면서 헌신 봉사했다. 성직자 세계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행동을 보여주면서 부자, 빈자, 고통받는 자들의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탁발 설교자들과 수도사들은 가난한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전도와 봉사 활동에 나섰다. 중세 봉건사회의 발전이 가져온 모순에 맞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복음전도, 청빈한 삶, 봉사, 명상을 기독인의 표지로 삼았다.
이 시대의 예술과 문학 작품은 탁발 전도자들을 단장 짚고 맨발에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실망하면서, 복음전도와 봉사활동을 하는 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망했다.
베네딕트 수도단, 클루니 수도단, 시토 수도단은 웅장한 교회당과 화려한 수도원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갈망하던 영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교황청은 사치와 허영에 빠져 있었다.
대중이 탁발 수도사들을 환영하자, 교회와 교황청은 불안과 위기를 느끼고 탁발 전도자단, 탁발 수도사단을 각각 독립된 수도단으로 인정해 사회적 갈증을 해소시켰다. 불안 요소를 역이용했다.
중세기 기독교 수도단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제1수도단(The First Order)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고전적 수도단이다. 제2수도단(The Second Order)은 소유를 포기하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설교를 하는 탁발 수도단이다. 제3수도단(The Third Order)은 가정에서 수도사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수도단이다.
12세기와 13세기는 탁발 수도사들의 시대였다. 걸식 수도사들은 빈곤의 삶을 살면서 구걸 활동으로 불평등하고 부도덕한 세상에 항거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막 10:25)”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굶주리고 소외되고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빈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일을 돕고, 노동을 제공하면서 복음을 설교했고, 잠자리와 음식만 제공받았다.
탁발 설교자단, 탁발 수도단들이 생겨난 때는 봉건제도, 인구이동, 도시 교역의 확대, 화폐 경제의 발전, 산업화가 가져온 부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가난한 자들이 급증하고, 도덕적 타락이 도처에 만연하며, 성직자들이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할 때였다.
한편에서는 이단이 출현하여 기독인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영적 갈망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신앙운동의 출현을 기대, 예견하고 있었다.
왈도와 리용의 빈자들과 롬바르디의 빈자들을 뒤따라 설립된 삼위일체 수도단, 프랜시스 수도단, 도미니크 수도단, 갈멜 수도단, 어거스틴 수도단은 교황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선교, 학문, 봉사활동을 하는 탁발 수도단들이다.
수도단은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수도사들이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노동을 제공하고,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려고 설교한 것이다. 탁발 수도 운동은 용사들의 시대가 낳은 새로운 형태의 신앙고백이었다. 기존 교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