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학에서 강의(교수)하는 제자를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제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요즈음 학생들이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여론조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2013년 기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19.4%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 중에 ‘언행 불일치와’ ‘부정부패’가 주로 꼽혔습니다. 사회봉사활동은 개신교가 41.3%로 가장 높이 평가됐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 입에서 기독교를 ‘개독교’란 말이 유행한다면 앞으로 교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평가를 교회가 모른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고 개혁을 하겠습니까?
신학생 시절 성가대장이 주일 오후에 전후좌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저에게 “전도사님, 제가 보기에 너무 교만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억울해서 밤새도록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 교만한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신학생들에게도 “전도사님은 너무 교만해 보입니다”란 말도 들었습니다. 그 후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사업을 경영하는 00그룹의 회장(장로)님께서 어머니의 간증을 하셨습니다(25년 전). “당시 저희 집안은 주변에서 제일 부자였습니다. 집에 자가용도 있고, 가정부는 물론, 어머니에게는 모피코트를 비롯해 좋은 옷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일에 교회 갈 때는 교인들과 비슷한 옷을 지정해 놓고, 그런 옷들만 입고 출석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유한 내 모습 때문에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면 안 되고, 더욱 잘 산다고 교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 저도 지금까지 교회 갈 때는 늘 같은 양복 한 벌로 갑니다.”
그 간증을 듣고 필자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울 명동에서 패션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자가용을 타고 다녔고, 최고로 좋은 옷들과 장신구 등, 남들이 볼 때 얼마나 거만하고, 교만하고, 잘난 척한다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얄미운 사람이야” 그 말의 의미는 “너는 외모부터 행동하나 하나가 남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네 곁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그래서 얄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쳐서 복종을 시키는 시간이 15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런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필자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꽃받침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통해 남을 높이고, 낮은 자리를 더 좋아하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씀이 레마가 되어 “형제들과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 3:17)”란 말씀을 붙들고 가정과 사역, 삶에서 정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악인과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악인’은 북이스라엘 왕들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말씀을 알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요즈음 교회 내에서도 자신만 모르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가 기도원에 찾아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제 섬기던 교회에서 잘렸습니다. 이유는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때문입니다. 헌신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다가 예화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에는 쌀 수십 가마니씩 끼고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날 사회를 본 여전도회장이 좋은 옷을 입고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나왔습니다. 그 반지가 쌀 200가마니 정도의 가격이라고 합니다. 여전도회장이 예배가 끝나고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부목사님을 사퇴시키지 않으면 저는 교회를 나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목사님 호출로 불려갔습니다. 목사님은 전후좌우를 설명하신 후 사임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쓰고 나왔습니다.”
필자는 후배 목사에게 “잘했습니다” 격려를 했습니다. 교회 내 그런 분들이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수백 수천만 원짜리 핸드백과 시계, 장신구, 좋은 자동차, 좋은 저택을 갖고도 선교헌금에는 늘 인색하고, 어려운 이웃 돕기는 물론 각종 헌금을 아깝게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도 모르는 교만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것을 잠시 빌려 쓰다가 떠날 때는 모두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단 한 가지도 손에 들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부유한 한 사람이 하늘과 땅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결론
전 서울은행장(30년 전)님 저택에 가면 구석구석에 고물상처럼 많은 폐품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권사님, 왜 좋은 집에 이렇게 많은 폐품들이 쌓여 있습니까? 한 푼이라도 절약하지 않으면 어떻게 남을 돕고 어려운 목사님들을 돕겠습니까?” 어느 날 권사님께서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울릉도는 물론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목사님과 많은 분이 병문안으로 찾아왔습니다. 00여대 부속병원 개원 이래에 이렇게 많은 분이 병문안하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과거는 분명히 현재의 산물입니다. 그 권사님을 통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수백 수천만 원짜리 핸드백과 시계, 장신구, 좋은 자동차, 좋은 저택보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요? 나만 모르는 교만이 있다면 그것을 빨리 찾아 회개하는 것이 곧 행복이며, 성공의 길입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