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자립과 더불어
1. 청년들에게 자립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자립의 정의, 어디에서 자립해야 하는지(이유), 누구에게 자립이 필요한지(대상)에 대한 질문입니다.
1) 자립이란 OO이다.
2) OO로부터 자립해야 한다.
3) 자립 훈련이 필요한 대상은 OO이다.
그에 대한 청년들의 답입니다.
1) 자립이란,
모든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행동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홀로 버티기이다.
2)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모의 품에서 자립해야 한다.
외로움에서 자립해야 한다.
친구, 가족, 가치관 등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립해야 한다.
청소년 때부터 자립해야 한다.
3) 자립 훈련이 필요한 대상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청년이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 준비가 된 모든 사람이다.
나이다.
2. 자립에 대한 고민은 청년 시기부터 많이 갖게 되는 고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중요한 점을 놓치곤 합니다.
그저 집을 나오는 것이 자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혼자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의 품에서 나와 혼자 자립하고 싶은 이유는 정말 혼자 살고 싶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섭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혼자가 되고 싶다면 무인도에 가야 하겠지만,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SNS와 미디어 속에서 관계를 맺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밤늦게까지 자신의 삶을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하는 자립이라면, 그것은 자립이 아닙니다. 또 다른 것과 관계맺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균형이 있었던 것이 그로 인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즉 자유가 아닌 실은 종속적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홀로’ 됨은 ‘더불어 살기 위함’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자립의 목적은 ‘자유’를 위해서이고, 그러나 ‘더불어 삶’을 향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립의 이유’, 즉 어디에서 자유해지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립만 외치다가 하나님에서부터 자유해진다거나 정말 사랑해야할 사람과 멀어지고, 세상의 노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출애굽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이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현재 매여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특별히 수동적인 매임이 아니라, 적극적인 매임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냥 부모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무언가가 중요합니다.
실상은 그것에 매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립을 선택해 장소를 옮긴다 한들,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자립의 건강함을 보는 방법은 시간을 보면 압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스스로 선택해 쏟고 있고, 후회하며 다시 그 시간을 선택하는지, 다시 말해 중독되어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돈일 수도, 일일 수도, 사람일 수도, 게임일 수도, 술일 수도 있습니다. 연애일 수도 있습니다.
4. 물질과 시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시간 안에서 모든 창조의 섭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게 삽니다. 그러면 위험합니다. 시간에 쫓겨 삽니다. 역시 위험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 안에서 물질을 다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즉 컨트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하는 모든 활동과 만남 가운데, 우리는 점점 시간에 쫓겨 우리에게 맡겨진 물질(여러 형태겠습니다만)에 지배당하고,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 관계, 즉 균형이 무너진 ‘사랑 노예’가 되기도 쉽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게임을 들 수 있겠습니다. 게임은 사람이 즐겁게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할 일을 하고 간단히 즐길 문화요소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독이 되면 오히려 일상이 망가집니다.
5. WHO ICO -11에 따르면(국제 질병분류체계) 장애 중 게임이용 장애를 포함시켰는데, 아래 9가지 중 5가지에 해당되면 중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게임을 못하면 금단증상이 나타난다(불안, 무기력 등).
-게임하는 시간 증가한다.
-게임을 통제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게임 때문에 이전의 취미에 대한 관심이 상실된다.
-심리·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알지만 과도한 게임을 한다.
-게임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가족이나 상담가에게 거짓말을 한다.
-무기력, 죄책감, 짜증 등 부정적 상황 해소는 완화를 위해 게임을 한다.
-게임 때문에 중요한 관계들(학업, 직장, 관계)를 위태롭게 하거나 상실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게임에 집착한다.
위 내용이 게임을 예로 들었지만, 게임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면 어느 정도 중독 테스트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게임에 대신하여 넣어보면 됩니다.
술을 못마시면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술을 통제하고 싶지만 잘 안 된다 등입니다.
미디어 중독, 스마트폰 중독도 마찬가지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6.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매여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균형이어야 합니다. 사랑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그 대상도 행복해지며 나아가 주변도 행복해져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그러므로 관계의 자립입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독립과 자립을 선택해서 집에서 나간다 한들, 사람은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립은 ‘공생’하기 위함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공생의 자립은 누구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보는 ‘자각’입니다.
여호수아 1장 1-2절에는 모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여기에 나온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더불어’와 ‘일어나’입니다. 즉 늘 함께하던 모세가 죽었다고, 여호수아는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신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제 홀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한 더불어,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갔던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한 홀로 됨입니다.
공생은 기생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립은 혼자가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됩니다.
7.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립형 인간이요, 독립형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자립은 ‘혼자 살래, 혼자 사는 게 좋아, 난 혼자 살고 있어’가 아닙니다.
자립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사람됨을 향해야 합니다.
만약 이 땅에 ‘더불어’가 사라져 갔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 시대의 여호수아들이 하나님꼐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홀로 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처럼 자립이라는 형태의 ‘분리’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에 중독되고 의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홀로 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불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립과 독립을 구현하지 못하니 그 누구와도 ‘더불어’가 안 됩니다. 상처받고 떠나고 상처받고 미워하고, 결국 누구와 함께 있어도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더불어’를 위한 홀로서기가 되지 않으니, 수없이 많은 시간 그 누구와 함께 있어도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8.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면서 여러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본은 올림픽 개·폐회식을 통해 한국이 입장이나 퇴장할 때조차 화면에서 가렸습니다.
한국이 음식을 공수해 가자, ‘한국이 감히 일본 음식을 안먹고 일본 음식을 가져오다니’라면서 역정을 내더니, 미국이 자국 대표선수들에게 음식을 공수해 가자 ‘그럴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경제 선진국 일본이 올림픽을 통해 보인 인간의 보편적 모습임을 알고 계십니까?
사람은 나보다 강해보이고 내게 뭔가를 줄 수 있는 대상에게는 하염없이 작아지고 의존하며, 나보다 약해 보이고 한때 내가 통치했다고 착각하는 대상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입니다.
그 모습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 안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향한 긍휼과 그 나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9. 일본의 강압적 식민 지배 아래에 있었던 우리나라는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독립선언서에는 놀라운 독립, 그리고 참된 자립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 중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안에 기독교 정신이 없을 수 없습니다.
독립선언서를 2019년 3월 1일 다시 현대어로 바꾸었는데, 그 부분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먼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은 자립의 이유를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 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쓴 민족의 리더십들은 일본이 아무리 폭력으로 지배했다 할지라도, 그 일본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선언합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가히 놀라운 선언이지 않습니까?
독립의 이유는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기 위함이며 그것을 위해 누군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 독립선언서의 주요 골자입니다.
여러분, 독립과 자립은 감정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중략)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 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양심과 진리가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억압과 폭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즉 독립의 근거는 미움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상처준 일본 너희가 싫어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소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진리와 함께, 양심과 함께, 남녀노소 구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당부합니다.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독립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제 나 혼자 될게”라는 감정적인 이유도 아니요, 오히려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당한 뜻을 드러내되 질서를 존중하여 정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 그리스도인은 올림픽을 보며, 일본 자체만 바라보는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위와 같은 놀라운 정신으로 독립하고 자유한 나라입니다.
독립의 정신은 내가 피해본 것을 생각하며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때문에 관계를 끊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결국 그래서 홀로 된다 한들, 결국 일본이 보인 모습처럼 강해보이는 존재, 내게 이득 되는 존재 앞에는 한없이 작아지는 또 다른 종속당한 노예가 될 뿐임을 잊지 마십시다.
11. 한국뿐 아닌 전세계에 만연한 갈등의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참된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당장 편할 것 같은 이유로 자립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장소를 변경해도 자립과 독립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멸시하고 차별하고, 돈의 노예로 종속화시키려 하는 모든 시도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편협함으로 서로를 감정적으로 보거나, 남과 여의 구별을 놓고 가졌던 감정적 시선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인종 간의 갈등 앞에서 참된 독립을 선언해야 합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모두와 함께 사랑하며 그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앞에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음을 인정하십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립인이 되십시다.
그리스도인의 독립 정신은 온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곧 시작이 성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립하셨습니까?
자립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여러분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그 노예 된 삶에서 자유를 선언하십시오. 미워하는 대상에게서 얻은 감정에서 자립하십시다.
어찌 그리스도인의 독립이 사소한 감정 앞에 무릎 꿇겠습니까?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이제 홀로 일어나! 더불어 함께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