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읽는 설교 166] 빗나간 책임추궁
본문: 요한복음 5:10-11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38년 된 병자가 병이 낫는 장면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을 만나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38년이나 긴 세월을 자리에 누워서만 지내던 병자입니다. 그가 순간적으로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누웠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는 감격적인 병자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이 나은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런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빗나간 책임추궁’이라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은 형식이 우선이다
신앙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준수와 이행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율법이 지켜지고 있는가, 지켜지고 있지 않는가만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은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시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형식이 필요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용과 함께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형식이 제대로 보전될 때, 내용이 담기게 됩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형식이 멋있고 좋아 보여도 내용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꼭 그렇습니다. 신앙에는 형식이 필요하지만,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내용은 생명력이 발휘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형식주의는 율법주의를 대표합니다. 율법주의는 신앙의 내용이 없는 경우입니다.
신앙의 형식주의에는 그 내용인 자유와 기쁨이 없습니다. 내면의 자유과 기쁨은 신앙인의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율법적 형식주의는 비판과 정죄만 가득합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신앙의 내용은 전혀 없으면서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꼴입니다.
2. 율법은 사람보다 우선이다
율법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에 시달려 고통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가 병이 나았으니 축하를 해줘야 할 자리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라!”고 축하하면서 격려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서 책잡기를 시도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규례에 따르면, 결정적인 저촉 행위였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엄연한 물건 운반 작업이었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병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알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주의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는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율법을 지켰는가, 지키지 않았는가만 중요합니다. 율법 준수의 실적이나 업적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의 준수가 출세를 보장하는 길이요,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존재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생활을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 율법의 준수나 진행이 필요합니다. 그런다 해도 그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법으로 너무 매정하게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법이 사람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사람보다 우선이 되는 이유입니다.
3. 율법에는 이웃 사랑의 마음이 없다
율법은 이웃 사랑이 뒷전입니다.
유대인들의 빗나간 책임추궁에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에는 생명의 우선순위, 이웃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만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빗나간 책임 추궁에서는 신앙의 핵심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보기에도 창피한 신앙의 추태(醜態)일 뿐입니다.
신앙의 보수주의를 자처하면서, 믿음이 강한 척 하는 위선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청교도의 편협한 독선과 배타주의는 신종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율법은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만이 진정한 신앙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율법의 핵심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합된 상징입니다.
핵심이 빠져버린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형식주의만을 고수하는 강박증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새로운 계명을 가르쳐 주신 이유입니다.
4. 정리
우리는 형식에만 치우친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형식적 신앙에는 신앙의 생명력이 없습니다. 형식적 신앙에는 주님을 믿는 ‘자유와 기쁨’을 내면에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율법의 형식에만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지 말게 하소서. 사람이 율법보다 먼저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갖게 하소서. 신앙의 핵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