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때가 차매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신 하나님
이장식 박사 학문 여정, 한국교회 향한 하나님 사랑
‘토착화는 다름 아닌 복음화’ 주장, 급진 아닌 성서적
깊은 식견 바탕으로 한국교회사에 원근법적 통찰력
‘중국 아닌 일본 지배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 견해도
한 세기 살면서 하나님과 한국교회, 이웃 섬긴 여정
우리 모두에게 귀감, 한국교회에 소중한 자산 될 것
고신 교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천 환 목사님으로부터 혜암(惠岩) 이장식 박사님(1921-2021)의 소천 소식을 듣고, 그 분이 살다간 한 세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경상남도 진해에서 출생하시고 대구 계성학교와 조선신학교를 거쳐 캐나다 퀴즈신학교와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시고, 후에는 오하이오 주 드뷰크의 아퀴나스신학대학에서 최종학위를 하신 이 박사님은 한국신학대학과 계명대학교에서 36년간 교수하셨다.
은퇴하신 후에는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가셔서 동부아프리카장로교회 신학교에서 다시 15년 간 교수하였다. 귀국하신 후 다시 15년 간은 혜암신학연구소를 설립하시고 ‘신학과교회’를 발간하는 등 계속적으로 연구하시며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다.
그의 귀천(歸天) 소식을 듣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 분을 그의 나라로 인도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이 축적해 온 학문의 여정을 생각하면,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대학자를 잃은 아쉬움이 크지만 하나님의 하신 일이기에 우리는 그 분의 생애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나는 아쉽게도 그의 문하에서 직접 배운 바는 없고, 그의 강의실에서 배운 제자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연유로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71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 <기독교사상>을 읽으면서 그의 글을 접했지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이었을 것이다. 부산 영락교회가 ‘한국교회와 토착화’라는 주제로 신학강좌를 개최했는데, 그 때 강사로 오신 분이 연세대학교 한태동 박사와 이장식 박사였다.
당시 토착화론은 중요한 신학 주제였고,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진보적인 신학자들 간의 토론이 제기되던 때였다. 나는 그때 가까이에서 이 박사님을 대하게 되었다.
한태동 박사에 이어 이장식 박사가 강연했다. 준비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가며 강의하셨는데, 성실하게 강연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강연 원고는 후일 <기독교사상>에 게재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의 강연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쓴 한국신학사 관련 글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때 그는 ‘토착화는 다름 아닌 복음화’라고 주장했는데, 김의환·박아론 등의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랐으나 변선환이나 유동식 같은 감리교 학자들처럼 급진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의 주장처럼 ‘성서적인 접근’이었다.
그 후에도 이런 저런 접촉이 있었는데, 한 번은 기차 안에서 우연하게 그를 반갑게 만난 일도 있다. 그 때 그는 ‘주간조선’을 읽고 계셨는데, 짧은 대화였으나 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진해보통학교와 경화동교회에서 홍반식과 교유(交遊)하였는데, 세 살 위인 홍반식은 고려신학교를 거쳐 고신의 구약학자가 되었고, 이장식은 신학적으로 그 반대편에 속한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신의 교회사학자가 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자신은 “사실상 고신 출신”이라는 말씀이 친근감을 더해 주었다.
그 후에 한국교회사학회 일로 통신한 일이 있는데, 그 때만 해도 학회 초기였음으로 이장식 박사를 비롯하여 민경배 홍치모 교수 등이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사실상 그의 책을 통해서였다. 대학에서 신조사(信條史)를 공부할 때 그가 한국신학대학에서 발간하던 <신학연구> 9집에 썼던 신조의 형성에 대한 논문을 읽고 복사 수준으로 가감하여 좋은 성적을 받은 일이 있다.
고신에서 공부하면서 한신의 신학저널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보다 3살 위인 이만규 형님 덕분이었다. 신학대학원생일 때는 그의 <기독교사상사>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역사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의 <기독교 신조학 1·2>는 오랜 기간 동안 가르침을 주었던 소중한 문헌집이었다.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의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한국교회 100년>도 한국교회사를 헤아리는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분은 아니지만, 한국교회사를 헤아리는 안목도 예사롭지 않았다. 서양교회사에 대한 깊은 식견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사를 읽고 해석하는 원근법적 통찰력을 얻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단행본 외에도 <세계와 선교>, <기독교사상> 혹은 <신학사상> 등에 기고한 그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오늘의 나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랜 후에 그의 회고록, <창파에 배 띄우고>와 부인 박동근 여사의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를 읽고 그의 가정, 삶의 주변, 수학과 교수 활동 외에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장로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박동근 여사의 모친이자 이장식 박사의 장모인 최정선 여사는 호주선교부가 설립한 서울 진명여학교 출신이다.
후에 역시 호주선교회가 설립한 진주 시원(柴園)여학교 교사였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멜버른에서 공부할 때 시원여학교 교장을 역임한 호주 여선교사 거이득(Edith Kerr)의 조카인 로마(Roma Richardson) 여사로부터 1929년 3월의 시원여학교 16회 졸업사진을 얻었는데, 그 사진의 한국인 교사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동근 여사의 회고록에 바로 그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고, 내가 궁금해 하던 그 한국인 교사가 다름 아닌 이장식 박사의 장모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는 일이라고 여기겠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 사진 한 장은 역사를 해명하는 단서가 되기에,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2014년 5월 2일에는 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 1층에서 ‘부산총회 이후의 WCC영성’ 포럼이 있었다. 1부 예배는 이장식 박사가 설교했고, 2부 발표 때는 이형기 교수와 더불어 나도 발표했는데, 그가 케냐에서 돌아온 이후 첫 만남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대해 주었다.
그 해 12월 6일에는 인천 신재철 박사와 함께 화성군 봉담읍의 ‘광명의 집’으로 찾아가 이장식 박사님 내외분을 만나고 저녁을 대접했다. 더 좋은 것을 대접하고자 했으나, 극구 사양하시고 추어탕을 드시겠다고 하셨다.
2016년 5월 27일에는 백석대학교 진리동 2층에서 열린 샬롬나비 주최 ‘한국현대사 어떻게 볼 것인가?’ 모임에서도 이장식 박사를 만났는데, 나는 그 때 논평자였다.
그날 이장식 박사님은 “우리가 남의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은 그나마도 다행이었다”고 말씀했는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지금의 중국 공산당 행태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의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4월 12일에는 크리스천투데이 주최로 한국교회 전반에 대하여 이장식 박사와 대담하는 영광을 누렸다. 신문에 보도된 것은 일부이지만, 한 시간 이상 대화하고 의견을 나눈 일은 늘 기억에 남아있다.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전화하고 안부를 물으며 노학자와 교류했던 일은 나에게는 소중한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2020년 8월에는 이장식 박사의 100세를 기념하여 혜암연구소의 <신학과교회>가 기념호를 발간한다며 편집위원회로부터 논문 집필을 요청 받고, ‘교회사학사에서 본 이장식 박사의 학문의 여정’이라는 긴 논문을 썼다.
제목 그대로 이 박사님의 학문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의 연구 활동과 저서들에 대해 논평한 것이다. 보다 앞선 2015년에는 한국개혁신학회가 발간하는 ‘한국개혁신학’ 45호(2015.2)에 “한국에서의 교회사 교수와 연구, 1900-1960년대까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다른 교회사학자들과 더불어 이장식 박사의 학문의 여정에 대해서도 소개했는데, 이 글을 읽으신 이 박사님은 긴 격려의 글을 보내주셨다. 그 후에는 <한시집>과 한신대학교 출판부가 펴낸 백세기념문집인 <우로(雨露)>도 보내주셨다.
이런 일들을 통해 나는 한 사람의 역사신학자가 걸어 온 삶의 여정과 그의 깊은 학문의 세계를 배우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감사할 뿐이다.
한 세기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한국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겼던 그의 아름다운 여정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제 이 땅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주님 안에서 안식하시고, 박동근 사모님의 여생이 더욱 복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2021년 9월 18일
이상규 박사
백석대 석좌교수
전 고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