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어린아이처럼
1. 어린 시절, 책을 어렵게 쓰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어려운 단어를 알고 계실까?
마흔을 넘어서니, 존경스러운 점은 어린이 작가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쉬운 단어들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린이부터 노년까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글을 쓸 수 있을까? 글 한 문장에 자랑은 없고 사랑만 있다는 것 말이지요.
2. 달꿈학교가 올해 어린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라서 조심스러운 점도, 당황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선생님께서 학교에 잠시 방문했습니다. 대화하던 중 아이가 와서 제 귓속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고는 ‘간질간질’이라고 말합니다.
선생님은 왜 달꿈에서 어린이를 맡게 되었냐고, 힘들지는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간지러워요. 우리 나중에 놀자” 아이를 다독이고는 “저도 어린이였으니까요.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저를 지키는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과 대화중 무의식(?) 간에 대답했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아이가 손을 떼며 묻습니다. “왜 이렇게 간지러워요 류한승 목사님?”
3. 현재의 류한승은 목사이지만, 저도 어린이였습니다. 누구나 시간이 흘러 갈수록 그리워지는 옛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말이야….”
왜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도, 그 때 사람들과 거리를 꿈꾸곤 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그 시절 동네 거리에서 놀았던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있고, 등하굣길에 했던 친구들 어깨 너머로 보던 뽑기를 집에 와서 하다 냄비를 태웠던 날들까지, 떡볶이 하나를 나눠먹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염없이 웃었던 날….
4. 어느 순간 조용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별하고 있었구나.’
돌아갈 수 없는 거리를 꿈꾸는 이유는 순수함이라는 것과 점점 헤어지고 있기 때문이구나. 그 시절의 그리움이 있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상실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구나. 다른 것으로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그 거리를 구현하면, 그 방법을 구현하면, 그 시절로 돌아가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꿈꾸기도 합니다.
5. 영화 <기생충>에 이어 <미나리>, 그리고 BTS가 빌보드를 휩쓸고 있는 와중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 풍경을 보면서도 아이러니합니다.
프랑스 파리에는 <오징어 게임>에 나온 옛 한국의 게임을 직접 체험해보는 전시관이 생겼답니다. 뽑기 한 조각이 프랑스 빵집에서 5천원에 팔린다니 정말…. 상상 동화에서도 못하던 상상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오징어, 오징어’ 해서 저도 <오징어 게임>을 봤습니다. 잔혹해서 피할까 하다, 제 안에 있는 잔인함보다 더하랴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456명의 사람들이 모여,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던 옛 놀이들을 거쳐 최종 우승자에게 456억 원을 주는 게임에 대한 내용입니다.
456명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위 내몰린 사람들, 배신당하거나 돈이 없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여 서로 경쟁해 이기고 결국 1등이 되어야 상금을 얻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며, 내내 잔인함을 넘어서는 슬픔이 저며옵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소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징어 게임 안에는 서글픈 현실이 서려 있습니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던 즐거운 기억이 돈과 이기심으로 바뀐 시대의 변화가 있습니다.
뽑기 하나만 손에 있어도 행복했던 시간은 가고, 한 명 한 명이 돈으로만 보이는 내면의 변화도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존재가 사라져가는데도, 더 자극적인 것을 서로에게 구하고 권하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 끓어오릅니다.
6. (결말을 말해야 글이 되어서, 오징어 게임을 보시고 싶은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게임을 구현한 사람은 게임에 참가한 1번 할아버지입니다.
살다 보니 돈도 사람도 그 무엇에도 만족을 얻지 못해, “나 때는 말이야…” 시절의 재미와 친구를 찾고 싶어합니다. 죽음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재미를 찾고 있는 할아버지는, 옛 거리와 옛 게임을 다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오징어 게임’을 설계했겠구나 싶습니다.
그 곳에 456명이 모입니다. 456억 원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7. 드라마 중간 할아버지는 주인공인 성기훈(이정재)을 살리려고 작심한 듯 보입니다. “우리 깐부 하자”고 약속합니다.
어린 시절, 모든 걸 다 줘도 되겠다 싶었던 진짜 친구, 깐부. 바로 그 사람을 할아버지는 발견하고 싶었던 겁니다. 결국 깐부 찾고 싶었구나. 지금 외로움의 이유를 깐부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던 것이구나.
8. 1등. 456억을 얻고 난 이정재는 모든 비밀을 압니다. 그가 얻은 456억 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값입니다.
이제 그 목숨값을 위해 이정재가 해야 할 일은, 다시는 옛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생명을 위해, 이제 그는 깐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이정재가 돌아선 곳은 다시 ‘오징어 게임’이었습니다.
9. 예상했지만,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역시 우리를 보면 압니다.
즐거움의 이유를 타인에게 두면, 그의 부재는 그에 대한 원망으로 변합니다. 기쁨의 이유를 그 때 그 시절로 한정하면, 현재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귀함을 놓칩니다. 정의의 부재를 타자의 무능력함에 두면, 스스로가 또 다른 게임의 설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는 누구에게나 깐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처음 만난 친구였고, 어떤 사람은 돈이었습니다. “다 줘도 아깝지 않아.”
10. 여러분에게는 깐부가 있으신가요?
혹시 여러분을 만족시킬 깐부 하나 만들다가 그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있다면, 수많은 타자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외로움과 공허감. 왜 우리의 몸집은 커져가는데, 속은 텅 비어가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사라지는 우리의 공허함을 우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래서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건 저에게서 순수함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린이 자체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어린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시선에 담기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작아서 어른의 시선에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 어린이를 보려면 반드시 뻣뻣해진 제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어린이는 땅과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그렇게 흙놀이가 좋았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는 타인은 우러러 볼 줄 압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고개를 올려야 볼 수 있는 사람들, 타인은 커보이고 나는 언제나 작은, 그래서 더 작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는 타인이, 어른이 아무리 상처를 줘도, 울었다가 금방 웃습니다. “울다가 웃으면 OOO에 털난대” 주변에서 놀려도 웃습니다. 한 번 상처받으면 삐진건지 복수심에 이글거리는지 모를 만큼 무서운 어른을 압도합니다.
어린이는 도움이 필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못하는건 못한다 하고, 자신을 솔직히 드러냅니다.
어린이는 작은 것에 기뻐합니다. 딱지 한장에 기뻐하고, 뽑기 하나에 울고 웃습니다.
만 원을 줘도 딱지를 선택했던 시절의 순수함은 미련함으로 대체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입니다.
작은 것에 경탄과 주어진 것에 기쁨을 상실한 요즘, 우리는 그 안의 상실을 채우기 위해 만원 십만원 백만원을 좇아 삽니다. 그럴수록 커져가는 공허감은 채워야 할 순수함이 사라져가기 때문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12. <오징어 게임> 작가는 무슨 생각이 들까 싶습니다.
유명해져서 좋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선정된 순간의 마음은 어떨까?
목사로서 안타까울 때는 밤새 작성한 설교의 내용보다 그 속의 예화와 엉뚱한 것을 기억할 때이듯, 아무리 반복해서 설교해도 바뀌지 않는 너와 나의 모습 때문이듯, 작가로서 안타까운 순간은 사람들이 작품 내에 담긴 의미과 이별하고 껍데기를 사랑할 때이지 않을까요?
<오징어 게임>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그러니까 작품 내에 담겨진 잔혹함이 자신의 모습임을 외면하는 모습도, 돈 때문에 생명도 형제도 친구도 다 잃어버리는 ‘오징어 게임’처럼 돈 번다고 중요한 시간도 사람들을 쉽게 버렸던 오늘 우리 모습도….
내 재미를 위해서만 타인을 유흥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1번처럼, 나랑 놀아주면 좋고 아니면 버리는 우리 모습처럼, 깐부 하나 만들겠다고 생명 놓친 할아버지처럼, 내 친구, 내 사랑, 내 가족만 보여 모든 타자의 소중함을 상실해, 관계의 폭은 좁디 좁아져 버린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13.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정재는 다시 돌아갑니다.
그 스스로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정의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다시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저는 그 ‘오징어 게임’을 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아니 전 세계 탑이된 드라마,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이런 말들 뿐입니다.
“정말 재밌다”, “1등이래 세계에서”, “누구누구 배우는 인스타에서 대박났대”, “오징어 게임 관련주 뜨겠다”, “드라마로 얼마 벌었대”….
<오징어 게임>을 다 보고 끝낸 우리는 이렇게 다시 ‘오징어 게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마음 속 구멍은 또 얼마나 커졌을까요?
또 다시 깐부 찾아, 부유함을 찾아, 흥밋거리 찾아 뭔가를 만들고 만나며, 그곳이 ‘오징어 게임’인지 모른 채 살지는 않을까요?
13. 어린 시절, 책을 어렵게 쓰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어려운 단어를 알고 계실까?
지금은 어린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누구 앞에서도 낮아지는 사람, 누구 앞에서도 배우는 사람, 타인을 나보다 높게 여기고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얼굴 못 본 사람도 많습니다. 게임 속으로 사라진 건 아니시겠죠?
보이지 않는 기간 동안, 여러분이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정의, 사랑, 우정, 놀이, 돈이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 깐부 찾다가 모두 잃지 말고, 어린이를 사랑해 보십시다.
어린이는 가장 낮아서, 가장 넓고 큰 바다와 같음을 잊지 마십시다. 부디 여러분의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