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불교 역사가 약 1650년 가까이 됩니다. 조상들은 오골계처럼 뼛속까지 불교의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복음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 전도 용어는 “예수 믿으면 복을 받게 됩니다. 부자가 됩니다. 질병을 치료받게 됩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빈민국가인 한국에 이런 말들은 온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사와 표적들이 초대교회처럼 교회마다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소문으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문제는 지금과 앞으로입니다. 요즈음 목회자들과 신앙인들 입에서 이런 말들이 유행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앞으로 10년, 20년 뒤쯤이면 유럽의 기독교처럼 노인들만 교회에 남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말들입니다. 이 모두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 시대의 흐름과 문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기도 방법에 불교 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00일 기도, 솔로몬의 1,000번 제사, 40일 금식기도, 21일 기도, 작정 철야, 작정 산기도, 작정 새벽예배 등 불교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와 날짜와, 시간을 지정해 놓고 정성을 쏟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시간의 틀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기도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수행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필자도 산기도, 금식기도, 작정 기도, 밤샘 기도 등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하나님 뜻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일방통행의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목회를 잘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선배들의 가르침과 부모의 신앙 교훈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복을 받는 것처럼 착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시간의 투자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는 금식기도의 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앙인들이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절박한 인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절박한 문제 때문에 금식 기도할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7)” 이 말씀은 잘못된 신앙생활의 습관을 바꾸기 위해 금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금식기도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금식기도를 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8)” 금식이란 수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바꾸기 위해 금식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은 내 일을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리고 기도의 질과 시간입니다. 필자의 아내는 평생 동안 저녁만 되면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 시간까지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많은 기적도 체험했고, 수많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거에 비하면 요즈음은 10/1도 기도의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밤이 새도록 기도할 때보다 더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요즈음 기도의 시간보다 빛과 소금의 삶과 질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 육신의 문제는 생각만 해도 모든 것이 늘 곁에 있습니다.
결론
한국교회는 선배들과 불교의 문화로 지극정성을 쏟고 고행과 수행을 하면 인생의 문제들을 응답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즉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필자가 30년 전 고 이0표 목사님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많은 복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사람 관계든 사역 관계든 문제가 생기면 그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책상 앞에는 그 당시에 제작한 패가 있습니다. 그 패를 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앞서가지 않기를 늘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면서 모세처럼 온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국제국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