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16] 왈도파 3-2: 왈도파 전통
평신도들에 설교와 그들의 죄 고백 청취 중요시
영향력과 수적 우세에도 독자 교회 세우지 않아
성체성사 신성시 않고, 복음전도와 봉사에 매진
로마교회 성례 개념 조롱과 성만찬 놓고 논쟁도
5. 왈도파 전통
사람은 자기 시대의 사회적 제약 안에서 산다. 완전하지 않다. 리옹의 빈자들 곧 왈도파 무리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들딸이었다. 중세기라는 시대와 로마 교회라는 구도 안에 살았다.
그들이 신앙한 것들 모두 다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어느 왈도파 독일인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화체설을 수용하기도 했다.
리옹의 빈자들은 자신들을 사도 시대 전통을 잇는 소수파 사람들(dissenters)이라고 생각했다. 왈도파는 단일 전통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다. 획일적인 규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 안에는 공통의 요소들과 함께 서로 다른 다양한 전통들이 공존했다. 로마 교회의 관할 아래에 있는 자들이 있었고, 밖에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성경적 교리를 신앙하고 복음전도를 하는 것은 동일했다.
일부 왈도파 사람들은 자녀들을 로마 교회에 보냈다. 일곱 가지 성례에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리옹의 빈자들은 왈도파 운동 초기에는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교회와 교권을 비판하지 않는 왈도파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례의 효력이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리옹의 빈자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조차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부 왈도파 구성원들은 기득권 세력과 조화를 모색했다. 로마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성인을 기념하는 예배와 연옥에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예배에도 참석했다. 로마 교회 신자처럼 보이려고 그러했을 수도 있고, 기존의 종교 행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관습적으로 참석했을 수도 있다.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왈도파는 성모 마리아의 중보하는 능력을 믿었다. 개혁신앙과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왈도파 문학 전반에 복음 진리와 윤리적 충고들이 나타난다. 예수를 엄격한 율법의 근원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완전하기를 원한다고 가르쳤다.
예컨대 음란한 생각과 외모를 금지하고, 이혼을 금지하며, 순결을 장려하고, 모든 종류의 맹세나 복수를 금지하고, 악한 자를 용서하라고 명했다. 교회가 성경이 금하는 맹세를 허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연옥설을 가르친다고 비판했다.
왈도파는 성직자 계급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존 교회의 지위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성직자들이 베푸는 성례의 효능이 개인의 거룩성에 좌우된다고 보는 도나투스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롬바르드파의 이단적 분위기가 왈도파와 결합되면서, 성직 제도를 강하게 반대하는 자들로 알려졌다. 롬바르드파는 기생충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 교회에 의존하여 살아가려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왈도파 지도자 그룹에는 학식이 높은 자, 문맹인, 반(半) 문맹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했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왈도파의 교육, 대량의 성경본문 암기, 교부들의 글 일부를 암기하는 방식은 책 부족이 야기하는 간극을 메웠다.
어느 고상한 독일인은 왈도파 구성원이 되고 싶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7개 조항의 간략한 고백문에 서명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자선과 설교만 하며, 체포되더라도 위증하지 않으며, 파송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기로 했다.
목축업을 하던 어느 젊은이는 25세 또는 30세 경에 왈도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3-4년 동안 신학수업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받고, 도덕성 심사를 받았다.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신앙의 상당 부분을 암기로 습득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배웠다.
이 훈련생은 학습과 검증이 끝난 뒤 파송을 받았다. 복음전도와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파송받았다. 상급자와 함께 보냄을 받았다. 이는 왈도파 공동체 안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의 지도를 받고 따랐음을 시사한다.
왈도파 목사들은 간소한 형태의 예배를 인도했다. 라틴어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여러 차례, 심지어 80번 또는 100번 반복하여 기도했다.
프랑스 동남부 지역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식사 후에 무릎을 꿇고 벤치에 기대어 오랫동안 기도했다. 이러한 사실은 툴루즈 종교재판관의 심문조서에 나타난다.
13세기 중반 프랑스 왈도파 신앙인들은 세족 목요일에 축사받은 빵과 물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1300년대까지 시행되어 온 왈도파 형제자매들의 비밀의식이었다.
왈도파 신앙운동 지도자들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은 평신도 추종자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죄 고백을 듣는 일이었다.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의 집이나 지하실에서 설교를 하고 추종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고백성사’와 비슷한 형태의 죄 고백을 들어주었다. 지도자들은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왈도파는 초기에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영향력과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로마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헌금을 하고,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했다. 사제들의 설교를 들었고, 교회력에 따라 절기와 금식일을 지켰다.
왈도파 복음전도―설교운동을 주도한 형제단은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기존 교회의 ‘성체성사’를 신성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다. 지도자들은 사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설교-복음전도와 봉사에 매진했다.
일부 왈도파 구성원들은 ‘성체성사’를 비판하면서, 성만찬을 신비한 것으로 이해하는 로마 교회의 성례 개념을 조롱했다.
알프스 산맥에 정착한 지식인 왈도파 목사들은 “반기독교의 자손들이 성례를 집행한다”고 말했다. 로마 교회의 성례가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다. 성만찬은 왈도파 구성원들 사이 논쟁의 주제였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5장 2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