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검찰을 개혁한답시고 자기 편 사람들을 심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6-17)”.
이 말씀을 함께 경청하고 그 권위에 복종할 때, 감사는 절로 찾아올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시와 찬송과 노래 속에서 나오는 행동에 대해 사려 깊고 적절한 방식으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포괄적 표현으로서 자연 발생적인 기독교의 노래뿐만 아니라, 예배 때의 찬송과 구약의 시편을 포함합니다. 이 단락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모든 활동이 주 예수에게 복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일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107편은 하나님의 구속과 섭리를 찬양한 시입니다.
시편 107편의 저자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저작 시기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로 보고 있으며, 이 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 감사 할 것을 권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에는 감사하라는 말씀이 26번이나 나올 정도로, 감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아주 중요한 믿음의 산실입니다.
필자는 오늘 제목처럼 “감사는 믿음의 꽃이요, 향기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긍정과 소통 가운데서 얻는 사랑의 열매요, 기쁨과 행복을 얻는 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이 모습대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라고 했고,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빌 헬롬 웰러는 ‘가장 행복함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식과 권세와 부를 많이 축척했다 하더라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다’,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감사는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며,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세상에서 감사하며 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덴의 낙원을 주셨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간교한 뱀(사탄)의 유혹에서 탐심의 유혹으로, 인간은 영원히 처절한 죄의 굴레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렸더라면,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다시 가인과 아벨 사건으로 가인은 동생을 죽이는 인간 최초 살인자로 성경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어짐은, 인간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삶에서 불거진 인간의 죄와 본성이 드러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 역사 속에는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숱한 사람들이 고통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지 못했던, 감사 없는 광야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던 사건들을 다 아실 것입니다.
특히 감사가 없는 생활은 탐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나보다 못한 이웃들을 향해 시선을 옮겨야 하는데, 이웃은 뒷전이고 자신이 먼저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인해, 자기가 차지했을 때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남이 차지하면 불평과 불만, 시기로 가득합니다.
감사가 없으면, 생활에서 늘 비교하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잘났는데 왜 나는 없을까? 왜 나는 가난하고 저 사람은 부유할까? 왜 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 잘 살고,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꾸질하게 사는가? 하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필자는 청소년 때 키가 작았던 것에 대해 불평이나 원망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필자는 구기운동을 좋아했지만, 학교나 교회 등 어느 단체에서도 제외되곤 했습니다. 축구나 배구 시합을 앞두고 실력 대신 늘 키 큰 사람들만 선발하다 보니, 필자는 늘 관중석에 앉아 구경만 해야 했습니다. 제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작은 키 때문에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키가 작다며 테스트 한 번 하지 않고 무조건 키 큰 사람들만 뽑는 이들을 원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려 노력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낭패나 실망스런 일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과거에는 키 큰 사람들만의 아성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시대에 대한 불만도 있었습니다. 사관학교나 경찰관 등도 키 작은 사람들은 아예 꿈꾸지 못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 선수로 뛰지 못했던 설움은, 군에 가서야 풀렸습니다. 제대로 실력을 인정받아 군 대표 선수로 뽑혀,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선수생활을 했던 기억이 새롭게 피어오릅니다.
물론 키가 컸더라면 국가대표도 꿈꿀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는 키가 작아도 실력만 있으면 무슨 운동이든 뛸 수 있는 능력의 시대로 탈바꿈했습니다.
특히 성경 역사 속에는 감사하는 인물들이 많은 축복을 받곤 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첫째 요건은 자신의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감사는 있을 수 없고, 감사에는 이웃에 대한 시기나 질투가 없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히 기뻐하며, 그 기쁨에는 이웃을 향한 나눔과 배려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부정한 곳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입술로 감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은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입니다. 우선 내 것으로 만들고 보자는 이기심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떤 후보는 당선만 되고 보자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공약만 앞세우는데, 그런 후보가 당선되면 미래는 어두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는 곳에는 은혜와 은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오로지 죄악으로 가득한 지옥 같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감사가 넘치는 곳에서는 서로 나누고 통용하며,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잘못을 용서하고 감싸주는 화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기쁨의 노래와 찬양이 함께 하는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치 현실의 민낯을 보노라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됐나 싶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버젓이 저지른 죄상이 낱낱이 드러남에도 철면피처럼 국민을 위하겠다는 공약을 스스럼없이 쏟아내고, 검찰을 개혁한답시고 자기 편 사람들을 심어놓아 자기 편의 죄는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오히려 야당에서 죄를 지으면 즉시 구속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국민들이 이를 정말 모르고 있는 줄 아는지, 참으로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잊은 채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싶어 한심할 뿐입니다.
저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쳐야 하는데, 오로지 권력을 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된 것도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감사하는 생활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냉대하고 있으니,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2022년 설 명절을 맞아, 우리 신앙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믿음의 생활로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불순종을 타파하고 오로지 긍정적인 마인드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정의와 공의와 정직이 통용되는 그런 나라로 다시금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특히 3월에는 이 나라의 중요한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국민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진정한 봉사자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