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로 시작하는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시를 아시나요?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 불리는 로버트 프로스트가 1910년대 창작한 시로 교과서에도 수록되었고 많은 명사들의 애송시로도 자주 거론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영시 중 하나로 불리우는 시 입니다. 한 사람이 가을날 숲 속을 걷다 두 갈래 길을 마주했을 때 고민 끝에 사람이 적게 지나간 길을 택했고, 그 이후로 모든 것 달라졌다 는 내용의 이 시는 인적이 나지 않은 길을 선택한 화자의 복잡한 소회가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처럼, 누구도 가본적 없는 길을 간다는 건 참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아무도 가본적이 없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위협이 다가올지 알 수 없고 그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적절하게 내려야 하는지도 가늠을 할 수 없습니다. 혼자 걸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성공을 거둔 위인들은 오늘날 혁신가 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최초로 대서양을 가로지른 콜럼버스나 아이폰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의 스마트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스타트 업 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기업가들이 이런 분들이죠.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명사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오신 분이십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뒤따라오는 이들을 위해 험로를 정리하고, 이정표까지 세우기 까지 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대중 문화 예술계를 취재하는 대한민국 1호 연예기자 정홍택 기자 입니다. 1936년생으로 한국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외신부, 문화부 기자를 거친 뒤 국내 최초의 종합주간지인 '주간한국'이 창간되면서 본격적인 연예기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후 예술의 전당 운영국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사무처장과 영화심의의장, 한국영상자료원장, 국제영상자료원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저작권보호센터)와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의 이사장 등을 거치며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도 중임을 맡아오셨습니다.
정홍택 기자에게 ‘대한민국 1호 연예기자’라는 수식어로 불리게 된 계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제가 활동하기 이전에도 연예계를 취재하신 선배 기자분들이 계시긴 했습니다. 영화, 연극, 무용,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폭넓게 담당하시는 문화부 기자 분들이셨죠. 하지만 가요계나 방송가 소식만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슈퍼스타가 탄생하며 대중 문화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산업화에 막 진입한 우리나라에서도 여가시간이나 휴일을 이용해 라디오나 TV로 대중 문화를 즐기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연예계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과 연예계에 대한 관심이 정홍택 기자를 대한민국 1호 연예기자로 이끌었습니다. “몇 번 잡지에 썼던 연예칼럼과 방송 평론, 그리고 가요 소개글 들이 내부적으로 평가가 좋았습니다. 거기에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에서 종합주간 신문(주간한국)을 창간하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연예계를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 기자가 말했던 주간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등 각 분야를 다양하게 다루었고 특히 연예기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국내에 우리나라에 연예기자를 탄생하게 되는 모태가 되었고 연이어 다른 언론사에서도 생겨나며 국내 연예계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정홍택 기자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지면에 ‘가요 순위 차트’를 실으며 가요계를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엽서들을 토대로 인기 순위를 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요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또 다른 척도인 디스크 판매량은 집계하는 체계가 없어 차트 자체가 없었죠. 저희 지면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요 차트를 싣기로 결정하고, 디스크 판매량까지 반영된 차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을 걷는데에는 역시나 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레코드 가게에서 협조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판매상들로서는 매출이 노출되는 부분이라 민감하기도 했고, 일일이 판매량을 집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홍택 기자는 직접 나서서 서울 시내에 있는 디스크 판매점을 거의 모두 방문을 해 사장들을 만나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번거로움에 손사레 치던 레코드 가게 사장들이었지만 점차 마음을 열고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판매상들은 옆집 전화를 빌려서 판매량을 신문사에 알려주며 국내 최초 가요 차트가 신문 지면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톱10’ 차트가 이른바 대박이 났었습니다. 순위에 오르는 노래가 히트를 하게 되고 신문 판매 부수에도 영향을 주었죠. 협조를 얻기 위해 판매상들을 만난 것은 제 개인적으로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최일선에서 고객과 직접 만나는 사람들의 생생한 현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걸 토대로 대중 음악계의 현주소도 많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가요 차트 외에도 정홍택 기자는 국내 최초 가요제인 ‘제1회 한국가요제’를 기획하여 개최하기도 하였고, 우리나라 대표 미인 대회인 ‘미스코리아’의 진행을 오랜 기간 맡으며 ‘진,선,미’라는 명칭과 ‘파란색 수영복’등의 시그니처 프로그램을 만들며 우리나라 연예계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자 생활 은퇴 이후에는 우리나라 창작물들의 저작권 보호에 앞장서며,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와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의 이사장등을 역임하며 양질의 K 컨텐츠들이 정당한 가치를 받을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던 ‘혁신가‘ 들의 삶은 우리에게 늘 감동으로 전해집니다. 사실 이런혁신가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시니어 자신이 혁신가 입니다. 로마시대의 정치가 클라우디우스 카에우스는 우릴 각자의 인생을 두고 ‘모든 인간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시니어들이야 말로 각자의 인생이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개척해온 가장 큰 ‘혁신가’ 들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그 어느 위인들보다 감동적인 걸음들을 걸어 오신겁니다. 인생이란 선택이라는 순간이 주는 두려움과 설레임들의 연속입니다. 임종 직전의 후회중 가장 큰 후회는 어떤 선택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크다고 하죠. 앞으로의 인생의 선택점에서 누구나 다 갔던 안전한 길보다는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으며 설레임 가득한 시니어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