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억하라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누가복음 24:6-9)”.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의 모습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 되자 여인들은 너무나 놀랐고, 제자들은 여인들이 실제로 보고 전하는 말을 믿지 못한 채 헛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부활을 믿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인 인간의 눈과 귀로는 부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천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미 일러 준대로 기억하라고 합니다. 바로 천사의 말이 빈 무덤을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열쇠인 것입니다.
다소 책망하듯 천사가 묻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살아 계신 분을 산 이들 가운데 찾을 방법, 그래서 부활을 믿을 방법은 무엇입니까? 천사가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 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라고 합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빈 무덤을 지켜보던 여인들은 평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그제야 기억 나서, 무덤에서 나와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알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알아보는 방법은 기억이고, 그 기억의 내용은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하신 예언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가 한 말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갑자기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니 그것을 기억해 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비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갑자기 소나기처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말씀으로 현존하고 있지만 우리가 평소 놓치고 외면하기 쉬운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말씀으로 들어오시어, 성령으로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말씀의 형상으로 들어오시어 성령으로 현존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기억해 내는 일, 오롯이 이것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니, 우리는 그 분을 기억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 안의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모르고 외면하는 세상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합니다.
나라와 민족은 서로 갈라져 적이 되었고, 상대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든 홀로 살아남으려 먼저 남을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전쟁이 늘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품으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의지하고 말씀께서 명하시는 것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말씀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독침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고, 죽이려 달려드는 원수를 사랑으로 삼켜버림으로써 죽음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절이 큰 사랑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약 3년의 코로나19 전염병이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정세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삶이 제한을 받고 움츠려 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에, 우리 신앙인들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코로나 유행으로 힘들어하는 이 땅 모든 분들께 위로를 드리며, 안타깝게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사태로 생명을 잃고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도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전쟁과 위드 코로나, 엔데믹 등을 외치면서 보다 정상적인 삶을 희망하는 이 때, 우리나라 정치의 현주소를 바라보면 기가 막히고 한심하다 못해 배신감을 느껴, 정치라는 말도 듣기 싫을 정도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공직자들은 국민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데, 어찌하여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해 국민 정서와 국민들의 안전한 삶에 등을 돌린 채 문재인 대통령이나 이재명 대장동 사태를 옹호하여 자신들의 죄를 묻으려 ‘검수완박’을 외치며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차라리 국회의원 제도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당리당략에 젖어 개인의 이익에만 집중하는 오늘날 국회는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옳지 않나 싶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못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국회의원이 됐다는 이유로 몇십 억씩 재산이 늘어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나라를 위해 청빈사상으로 일하다 낙향하여 서당을 만들어 후배 육성에 전념했던 이야기를 듣거나 실제 배우면서도, 지금의 정치꾼들은 명예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심사 때문에 애꿎은 백성들만 더 피곤하게 해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비록 자신의 당이 아니더라도 잘하는 일에는 함께 박수를 보내고, 잘못하는 것에는 옳은 지적으로 국민을 위해 함께 의논하는 문화가 꽃 피워나가야 하는데, 자신들의 이익으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공직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갖 죄를 다 덮어 쓰시고, 거기에 십자가라는 무서운 형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이 있을텐데, 도대체 예수를 믿는 자들인지 분별이 되질 않습니다.
자신의 당이 옳지 못한 일을 행하면 가차 없이 나서서 저지하고, 국민들에게 위협이 될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위협을 막아내야 할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의 득을 취하려 하고, 불미스런 일에 늘 함께하고 있으니 정말 진절머리 날 정도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절을 맞아, 정치인들이나 사업하시는 분들, 그리고 비신앙인들과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정신과 목적을 잘 기억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이 넘쳐나는 나라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