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정의 달, 그리운 어머니
나는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식구라고는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이북에서 월남하신 새어머니까지 네 명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셨다. 어쩌다 한 번씩 집에 오시지만, 실제로는 새어머니와 단 두 식구였다.
아버지로부터 간혹 생활비가 왔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옆방에는 모녀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무 우산을 조립하여 반찬값이라도 벌어 살림에 보태셨고, 딸은 공장에 다니며 할머니와 어려운 형편에 주일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매일 같이 추우나 더우나 새벽기도회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본 새어머니는 두 모녀의 신앙생활에 감동을 받고, 그 분들이 다니는 구세군교회로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셨다.
새벽기도회 참석 모습을 보고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닌가. 전도는 역시 말만 앞세우기보다 행함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로 느껴진다.
새어머니 고향은 이북 함경남도 함흥이다. 새어머니는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별 어려움 없이 생활했고, 꽤 부자였던 같다. 당시 여성이 전문대학까지 나올 정도면 과히 짐작이 간다. 일본어에도 능통하셨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공직 생활 중 우연히 남한 방송을 들은 후 배를 타고 월남하셨다.
새어머니의 인품은 나가 살던 진주 시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알 정도였다. 처녀의 몸으로 월남하여, 우연찮게 아버지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평생 고생하며 외롭게 사신 분이었다. 자신의 행복은 뒤로 한 채 남의 자식을 위해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며 한평생 희생하며 사신 분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수많은 새어머니들이 집에 들어왔다가 얼마 못 견디고 떠났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새어머니들에게 늘 “야야”라고 부르셔서, 나 역시 새어머니를 “야야”라고 불렀다.
새어머니는 거짓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하셨고, 나보다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섰으며,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도움을 받는 것은 싫어하셨고, 한 번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하시는 분이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인격적·도덕적으로 존경받으며, 마음까지 따뜻한 분이셨다.
목사님께서 교회 학생회 헌신예배 설교를 어머니에게 부탁하신 적도 있다. 그만큼 어머니의 신앙심과 인품이 훌륭했고, 도덕적으로 흠 없는 분이셨기에 믿고 설교를 부탁하셨던 같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면서 늘 이북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몰래 밤마다 눈물 흘리시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을지 간혹 생각해 보기도 했다.
2000년 8월에 실시됐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까지만 살아계셨더라면 늘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 당시 행여 북측에서 어머니를 찾는 분이 계실까 눈여겨 보았으나, 아쉽게도 찾는 분이 없어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진주시에서 약간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논과 밭과 못이 있었다. 농부들이 타작을 마치고 나면 이웃 아낙네들과 우리 가족은 벼 이삭을 주웠다.
오늘도 해는 서산을 넘어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고요한 저녁 무렵, 어머니와 나는 함께 이삭을 주우러 가까운 들판으로 갔다. 새 어머니는 저만치서 줍고, 나는 이쪽에서 이삭을 줍다 잠시 허리를 펴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어머이” 하고 목구멍 만한 소리로 불러보았다.
어머니는 그 소릴 듣고 쏜살같이 달려와 나를 꼭 껴안으셨다. 그 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을지, 과히 짐작이 간다. 나 역시 생전 처음 불러보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나는 한참을 안고 울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노을이 금세 사라지고, 어두움이 사방을 포위하며 우리 두 식구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 후 내일 학교에 갈 준비를 마무리하곤 잠을 청했지만, 들뜬 마음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후 어머니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학교 교수로부터 청혼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절했다. 나 때문에 좋은 혼처 자리를 물리치신 것이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어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청혼을 받아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다.
어머니는 신실한 신앙의 힘으로 끝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길러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엄청난 고난의 삶을 사셨다.
화장품을 보따리에 싣고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기웃거리며, 이른 새벽부턴 늦은 밤까지 자식 아닌 자식을 위해 무던히 애를 쓰셨다. 보따리 장사는 안 해 본 품목이 없을 정도로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지만, 학교 공납금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이제 대학을 갈 차례였다. 어머니는 교대를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국민학교 선생님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 크게 성공해 어머니의 삶을 보상해 드리며 효도하겠다는 야심찬 각오가 있었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로 했다.
서울로 갈 결심을 한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서운해 하셨다. 다 키워 놓으니 아버지 찾아 가나 싶기도 하셨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대학교 시험을 응시하기 위해 우선 마포에 있는 중학교 동창생 ‘함군’ 집에서 시험기간 동안만 있기로 하고, 친구 집에 묵으면서 마포시장을 구경하던 중 우연찮게 아버지 친구를 만났다.
그 분은 길거리에서 리어카로 사과 장수를 하고 계셨다. 간혹 진주로 오셔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던 분이었다.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면서, 요즘 아버지를 만나느냐고 물으셨다. “아니요, 아버지 뵌 지가 상당한 세월이 흘렀어요”라고 하자, 그러면 내일 아침에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며 손으로 약도를 그려주셨다. 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를 만난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여기서 아버지를 만나다니, 나는 돌아와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아저씨가 일러준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저씨는 마포시장 부근, 좁은 골목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지내고 계셨다. 그 식구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를 만났다. 만나면 반가워 서로안고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야 했지만, 오래 떨어져 살았기에 서로 서먹서먹했다. 오히려 남남 같았다.
그날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인해, 여태 모르고 살았지만 궁금했던 사건들의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진주에 계신 어머니가 아실까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진주에 계신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아버지의 소문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 간혹 어머니께서 “너는 동생이 있어 좋겠네”라고 말씀하셔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는데, 오늘에서야 ‘어머니 말씀이 사실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통해 친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을지로2가 스카라 극장 부근에 살고, OO호텔 앞에서 전화상회를 한다는 말까지 상세하게 들었다.
나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여태 생모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성북구 삼양동에 함께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여인이 나를 보더니 “어이구! 우리 아들 왔구나!” 하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놀란 나머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 임금도 아니고 도대체 아버지는 부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 참으로 기가 막힌 사실 앞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얼마 후 궁금한 게 있어 아버지께 물었다. “나는 4대 독자인데 왜? 호적에 아들이 있습니까? 또 여동생은 또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호적상 어머니가 충남 온양에 살고 계시다고 해서, 함께 만나러 갔다. 그곳에는 어머니와 할머니, 남동생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남동생은 나를 보더니 부끄러워하며 도망을 쳤다.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과 자녀들이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 앞에, 또 다시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척 싫었다. 내가 만나고 본 어머니들은 너무나 곱고 착한 분들이었다. 삼양동 어머니에게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시라”고 거듭 간청 후, 어머니와 이별했다. 그 어머니는 고마워하시며 나를 꼭 껴안으시더니 한없이 우셨다. 아버지 때문에 그 많던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교 시험도 보기 좋게 떨어졌다. 갈 데도 없고 해서, 공군 부 사관으로 입대했다. 부사관은 야간에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특권이 있어 지원했던 것이다.
지원 전, 친어머니를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뜨거워져 어머니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어머니 가족은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아픈 상처가 탄로날까 세운상가로 이사했다고 한다.
나는 용기를 내 세운상가를 뒤졌지만, 어머니의 성함만으로는 찾지 못하고 결국 공군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훈련이 끝나고 김포공항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어머니를 만나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에 김포공항을 지원했던 것이다.
드디어 첫 외출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는 세운상가를 찾아갔지만 세대주 이름을 몰라 전전긍긍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사 전 살던 가게 옆 중국집을 찾아가 남편 성함을 물었다. 중국집 종업원은 쉽게 이름을 가르쳐 주어, 쏜살같이 세운상가 관리실로 찾아가 세대주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851호라고 했다.
그런데 851이라는 호수를 듣는 순간, 어쩜 이런 우연도 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851은 당시 내가 항공기부에서 맡고 있던 항공기의 시리얼 넘버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도 있나 싶어 놀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체할 겨를도 없이, 급한 마음에 세운상가 8층 851호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851호실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 할 때, 떨리는 마음과 두근거리는 마음이 엉켜 머뭇머뭇했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키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곤 침착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누굴 찾으십니까?” 라고 묻길래 여기가 김OO 씨 댁입니까?”라고 답했더니, ‘번지수가 틀렸다’며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잠시 10분간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 벨을 누르니, 문을 열고 나오시며 하시는 첫 말씀이 “니가 나를 죽일라 카나 살리라 카나” 하시며 무척 흥분하셨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대뜸 “어머니는 피도 눈물도 없소?”라고 답했다. “지금은 남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시간이니 저쪽 옥상에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는 1971년 1월 31일 오전 11시 경, 혹독한 추위의 날씨였다. 따뜻한 다방도 아니고 옥상에서 이야기하려니 차디찬 칼바람 속에 마음까지 얼었다. 바로 눈앞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국도극장 간판이 보였다. <속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 제목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에 대해 다 알고 계셨다. 아버지와 생활을 같이 한 적이 없기에 아버지와 무관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때서야 안심을 하시는 듯 했다.
아마 아버지는 나를 핑계로 돈 요구를 하며 자주 괴롭혔던 것 같았다. 22년 만에 만난 모자 지간이었는데, 5분도 채 안 되는 대화를 끝으로, 나는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시라고 말씀을 드리고는, 애써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모자 창을 아래로 눌렀다.
어린 시절 가난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늘 마음이 아팠는데, 옥상에서 몇 마디 대화로 22년 동안 품었던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뼈저리게 사무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단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대화로 끝날 줄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싶다. 지금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짧은 만남이었으므로, 기억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다. 당시를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하다. 그 후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고,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후문을 들었다.
호적에 등재돼 있는 다른 어머니는 내 남동생을 낳았는데, 동생과 나는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랐다. 그 남동생과 누이는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달랐다. 여동생과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남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호적에 동생으로 등재돼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남동생과 남동생 누나는 호적을 따로 만들어 갔다고 한다. 이젠 완전 남남이 된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포 아버지 집에는 또 한 명의 어머니가 가끔 찾아온다고 했다. 도대체 나는 어머니가 몇 명일까? 어떤 이들은 어머니가 한 명도 없는데 나는 12명도 넘으니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불행하다고 해야 하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 하염없이 눈물만 쏟을 뿐이다.
어린 시절 늘 대문 앞에 앉아 아버지 오시기를 기다렸다. 나는 늘 ‘오빠 생각’과 ‘바위고개 언덕’이란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이웃집 식구들이 많은 것이 늘 부러웠다. 내게는 왜 형제와 친척들이 없을까? 마음 한구석 자리 잡은 외로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북에서 월남하신 어머니는 참 훌륭하신 분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친자식도 아닌데, 자신의 행복은 뒤로 한 채 순수한 신앙심 하나로 나를 키우셨다. 내게는 친어머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분이다.
생후 22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가 너무나 아쉬웠다. 깊은 포옹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애틋한 심정으로 그 동안 쌓였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밤을 지새우며 눈물 바다로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분위기가 고조될 줄 알았건만, 고작 아파트 옥상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대화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로 인해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망친 많은 ‘어머니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드리고 싶다. 물론 사죄를 드린다 해서 그 상처가 아물거나 회복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버지의 아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죄가 아닌가 싶다.
물론 나 역시 아버지의 피해자다. 특히 자식 아닌 자식을 위해 한평생 고통과 슬픔을 겪으시며 나를 길러주신 장길선 어머니께 더욱 감사드리며, 효도하지 못한 나의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드리며 깊은 사죄를 드린다.
나는 아버지를 마음에서 지웠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나쁜 유전자가 있을 테지만, 결단코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맹세를 지금까지 잘 지켜나가고 있다. 자녀들 역시 믿음으로 잘 자라줘 착실한 신앙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어 고맙고, 아팠던 상처들이 조금씩 지워져가는 것 같아 감사할 뿐이다.
나를 아는 분들은 고향에서 어머니와 살았던 과거만 알겠지만, 나는 고향을 떠나 세상에 홀로 떨어져 살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지만 군에 입대하면서 지금까지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중학교 때 ‘구세군 사관’이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었다. 하지만 너무 가난했던 터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뜻대로 살았다.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의 연속이었다. 탤런트나 배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음악학원에서 작곡가로부터 신곡까지 받았으나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물거품이 됐다.
군 제대 후 서울 잠실 ‘궁전’ 레스토랑에 취직해, 지배인이라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을 했다. 교회 집사님 아들이 궁전 레스토랑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오픈 날 나를 소개시켜 일하게 됐다. 처음 일주일은 바텐더에서 생맥주를 뽑고 양주를 내는 일, 그리고 안주를 만들어 내놓는 일을 담당했다.
일주일이 지나 사장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지배인으로 발탁돼, 생전 처음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지배인으로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많은 회사를 경험하며, 마지막 직장인 부산에 있는 항공회사로 내려왔다. 물론 김포공항을 지원했으나, 신원조회에 문제가 있어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는 후문이다.
부산 서면에서 약 3년 간의 하숙생활 후 결혼하여 집사람과 아들, 딸과 함께 저녁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성경책을 한 장씩 읽고, 딸과 아들이 번갈아 가며 반주를 했다. 찬송을 열심히 불러 주위 분들에게 늘 부러움의 대상이자 모범된 가정으로 소문이 났다.
IMF라는 위기가 닥쳐와 명예퇴직을 신청한 후 레스토랑을 시작으로 많은 종류의 사업을 했지만, 사람들과의 신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많은 애로를 겪었다. 그래서 항공회사 용역직원으로 근무도 했고, 심지어 정수기 방판 업계에서 일하며 본부장까지 승진했지만, 바라는 대로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목회 길을 서원했지만 약속을 저버린 지난날의 잘못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막심에서 오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닐까 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린다.
깊었던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성큼 도래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얄궂은 운명 속에서 살아왔던 지난 날들을 추억하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늘 긍정적으로 살아왔던 나의 삶은, 믿음이라는 충실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은 산 너머로 기웃, 산 끝에 걸터앉은 모습 위로 지난 날들에 아팠던 상처들을 쏟아내며, 슬픈 세월을 감내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드린다.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며, 아름다운 찬송이 하늘 끝까지 올려지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상처들을 싸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어릴 적부터 불던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그때 그 시절 아픈 상처를 위로하며, 쌓였던 한숨들을 찬송으로 지우고 새로운 도약의 날개를 펴고 소망의 긍정을 노래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고 가꾸는 5월의 푸른 하늘을 끝까지 열어나갈 것을 다짐해 본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은,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아닐까? 그 공동체의 가장 핵심의 주인공은 모두가 인정하는 ‘그리운 어머니’, 마음의 고향인 천국의 가정이 아닐까?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