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5월 15일,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언 2:1-5)”.
잠언 2장의 핵심은 지혜를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인생은 결코 악인의 길을 걷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향해 있는 반면, 의인의 길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향하는 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솔로몬은 아들에게 지혜를 얻기 위해 쏟아야 할 노력, 지혜로 말미암은 도덕적 유익, 그리고 부도덕한 자들을 멀리 하라는 지혜의 가르침 등을 훈계합니다.
2022년 5월 15일은 72번째 맞는 스승의 날이요, 각 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해마다 기념하는 스승의 날이지만 올해는 몇 해째 스승의 날인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코로나19로 학생들과 비대면인 상황에서 소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도 영향이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지나친 이기심과 개인주의로 인해,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임금과 스승,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는 뜻입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지만,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학생들이 졸업한 이후 개인적으로 스승에게 연락하는 경우도 드뭅니다. 예전에는 스승의 날을 맞아 모교를 찾아가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런 문화조차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 요즘 학생들 모습을 소개하려 합니다. 새학기였는데, 마침 비가 내려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의 안전 등교를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선생님이 승용차로 출근하던 중 움푹 파인 도로를 지나다 중1 남학생에게 빗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OO년!”이라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보다 못해 학생에게 “선생님께 욕을 하면 쓰냐”고 하자, 학생은 인상을 찌푸리며 필자를 계속 째려보았습니다. 그 모습에 참으로 어이가 없어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필자가 근무한 고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학생이 등교 후 개인 용무나 병으로 외출하려면 담임선생님에게 조퇴증이나 외출증을 받아 정문을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몰래 도망가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거짓말과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정문에서 근무하는 지킴이 교사를 따돌리려는 모습이 귀엽기도 합니다. 하지만 버릇이 되면 안 되기에, 학생에게 정식 절차를 요구했습니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즉시 분노가 폭발합니다. 다음에는 볼펜으로 자해를 한 다음 욕을 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도망가던 여학생 두 명을 팔로 잡았더니,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경찰에 필자를 성추행범으로 고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목적이 도망가는 것이었기에, 고발 후 유유히 현장에서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나타났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싶어 긴 한숨만 나왔습니다. 지난번에는 어쩌다 도망가는 남학생의 허리띠를 잡았는데, 멱살을 잡혔다며 억지를 쓰면서 경찰에 신고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너무 놀랍고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어쩌다 학생들의 인권만 강조되고, 교사들의 인권은 함구하게 됐을까요? 학교에서는 교사만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변명과 거짓말로 태연하게 연기하곤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일부 늦게 등교하는 학생들은 택시를 타고 학교 정문까지 오는데, 필자에게 택시비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돈이 없으면 걸어오든지 전화를 해서 차용을 해야 하는데, 마치 돈을 맡겨 놓은 것처럼 태연하게 택시비를 내라고 할 때마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거기다 등교할 때 걸어오든 택시를 타든, 학생들 대부분이 아이스커피를 하나 아니면 두 개씩 들고 옵니다. 이젠 아이스 아메리카노 없이는 안 되는 상황까지 온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요즘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라며 손과 팔, 다리와 가슴과 등에까지 문신을 해서 위압감을 조성합니다. 문신에 대해 교육계에 민원을 넣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표현의 자유라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 차원이 아니라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 아닐까요? 그게 무슨 예술적 가치가 있을까요? 얼굴 화장을 비롯해 얼굴에 붙이는 것들을 보노라면,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표현의 자유인가 싶습니다. 특히 여기가 해수욕장인지 학교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장 상태도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격과 인성, 윤리와 도덕, 나라의 역사를 진실되게 가르칠 수 있는 따뜻한 교육체계로 시급히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교육을 정치적 목적이나 어른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선 절대 안 됩니다.
현 시대의 교육현장을 이대로 계속 방치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정말 암울합니다. 우리 시대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던 옛 성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담은 진심어린 사제지간의 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육현장을 이대로 방치해야 할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관계기관도 학생 인권 운운만 할 것이 아니라, 나라 미래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1950-1970년대 교육 현장이 오히려 순수하면서 스승과 제자 관계는 더욱 돈독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 노력하면서 이웃과 나라를 위해 함께 의논하던 그 시절이 새삼 피어오릅니다.
비록 배는 고팠지만 더 배고픈 친구에게 빵을 건네고, 차비가 없으면 함께 걸어다니던 그 때 그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지금쯤 백발이 된 그 친구들은 이 시대를 바라보며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교육 현장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전교조라는 단체가 생긴 후 아이들의 정서와 문화, 역사관과 개인주의를 비롯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새롭게 전환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합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교사는 교사다워야 합니다. 멋대로 질서를 파괴하고 룰을 어기면서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것이 ‘학생 인권’인가요?
물론 교사답지 못한 교사도 있습니다. 교사도 가능한 봉사정신과 교사로의 품위와 인격, 역사관이 투철한 분을 발탁해야 하지만, 그저 교육 공무원 임용시험을 치러 선발하니 예전만 못하다는 핀잔을 듣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육부나 종교 지도자들에게 건의하고 싶습니다. 각 학교에,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을 파견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정신건강과 도덕·윤리관을 심어주는 커리큘럼을 신설하면 좋겠습니다. 직업 교사들에게만 맡겨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입니다.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연구하며, 그들의 친구로서 이 나라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직접 훈계하며 그들의 애로를 들어줌으로써, 훗날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교사는 많은데, 스승이 없습니다. 학생들 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사고는 점점 많아지고 악이 설쳐대는 시대가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 모두는 신앙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으로 사회가 점점 황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강과 산천초목은 5월의 푸르름을 유지하지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자연을 마구잡이식으로 파괴한 탓에 지구는 몸살을 앓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계도 세상을 방치한 탓에 기성세대는 물론, 학생들까지 파괴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을 새로이 거듭나게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단, 훈계가 들어 있지 않는 사랑은 금물입니다. 때로는 눈물의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교육의 미래는 염려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훈계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훈계 없는 사랑은 무용지물입니다. 매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올바른 훈계로 최선을 다해 거듭난 교육으로 부흥 발전해 나가는 부모와 교사, 관계기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