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09]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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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그렇겠지만 대개는 암울한 일들이 더욱 그런 것 같다.
이혼 소송 사례를 모아 만드는 <사랑과 전쟁> 류의 드라마도 막장이라고 비난받지만, 사실은 현실에서 벌어진 사례들이 휠씬 더 막장이라 드라마로 옮기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너무 상상을 벗어나서 공감이 안 되고, 조작을 의심받을 수준이라는 것.
반대로 좋은 쪽의 사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서 벌어지기가 어려워서, 영화와 드라마는 그런 이상향을 그린다. 그러므로 로맨틱한 영화와 드라마는 시청자가 비현실성을 알면서도 대리만족으로 즐겨 보게 되는 일종의 판타지다.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루어지기 힘든 아름다운 일들의 예는 많다. 학창시절 첫사랑과 십수 년 동안 사랑싸움을 하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정도나 일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는 정도는 현실에서도 더러 있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나 보니 어린 시절 잠시 스친 그 애틋한 아이였다는 식의 확률적 개연성이 떨어지는 설정도 흔하다.
우선 관객 수와 시청률은 현실과 동떨어지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이야기를 만드는 가장 큰 동기가 될 것이다.
제작 여건상 문제도 있다. 엄청난 우연과 기막힌 인연으로 누구는 알고 보니 형제였고, 연인의 동생은 내 친구와 아는 사이였고, 주인공의 친구는 또 누군가와 같은 직장 사람이고, 우연히 알게 된 인자한 할아버지는 연인의 아버지이고, 연인이 어릴 적 살던 동네는 같은 지역 같은 마을이었고…. 이런 식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짜여진 공간 속에서 특정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그 안에서 이야기를 꾸려 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다 연결되어 스토리를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대충 감안하고 보지만 무리수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를 해 보기도 전에 이런 로맨틱 코미디 류의 영화에서 사랑을 배우고 미래를 꿈꾸게 되지만, 현실로 잘 빠져나와야 한다. 현실 직시가 부족한 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연애와 사랑에 관한 두 번째 칼럼집의 제목이 <연애는 다큐다>인 이유가 바로 인생이 영화가 아닌 지독한 현실임을 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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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결혼 생활이 힘든 것은 사람 간의 갈등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헤어질 만큼 힘든 일이나 갈등과 오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 풀리고 해결된다. 그 갈등과 갈등의 해소란 스토리를 위한 일종의 장치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포장한다.
현실은 그럴 수 없다. 갈등과 오해는 사랑에 상처를 입히고, 상황이 종료돼도 두고두고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을 주제로 그려지는 영화와 드라마 주인공들은 다 선남선녀에 수려한 배우들로, 현실에서는 만나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말은 또 어떤가. 현실에서 그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그토록 촌철살인의 대사와 적재적소의 어휘를 매번 구사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나.
그런 말들은 물론 작가의 손에서, 그것도 여러 번 생각하고 정제한, 보조 작가들까지 동원해 고르고 고른 대사들이다.
특히 남자 주인공들이 멋있게 나온다. 남주들은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가 아주 현명하고 배려가 넘치며 희생적이면서 싸움도 무지 잘한다. 나쁜 사람 같아도 알고 보면 속이 깊고 따뜻한 츤데레이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뿐 그야말로 멋짐이 폭발하는 캐릭터들이다.
그런 데다가 대부분 비열하고 치사하며 찌질한 남자가 함께 등장해 주인공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저질남에서 바로 그 훈남으로 갈아탄다든지, 훈남이 저질남을 혼쭐낸다든지 하기 때문에, 비교가 돼서 더욱 멋져 보인다. 여성들이 이런 것만 보다가 현실을 보면 급 우울할 수밖에….
여주인공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다 진흙 속의 진주인데, 빛을 보지 못하다 남자를 통해 진면목이 드러나는 퀸카들이다. 그들 역시 진실한 순애보를 보여주는데, 질투심 많고 심성이 못된 여자 캐릭터와 비교되면서 더욱 진가가 드러난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낮다 보니, 자꾸 눈만 높아지고 본전 생각이 난다. 만족도에 미달될 바엔 그 스트레스 받는 일을 왜 하냐 싶기도 하다.
요즘 넷플릭스 등 OTT에 빠지면 결혼도 안 한다는 말이 있다. 미드와 영화에 빠져 연애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겠지만, 어쩌면 드라마는 행복한 결혼이 요원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드라마의 환상에서 깨지 않고 계속 머물게 하는 현실도피 수단을 제공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멋지고 예뻐 보인다. 문제는 계속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며, 현실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또는 16회 정도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잘 먹고 잘 살았대(happily ever after)’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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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가 현실과 다르다는 의미는 의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정의의 해결사가 등장하고 극한의 어려움이 풀린다. 손이 묶여 있어도 어떻게든 풀게 되고, 주변에 깨진 병조각이라도 있어 끈을 자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비슷한 일을 당한다면 그렇게 간단히 벗어날 수 없다.
한 TV 프로그램에 성범죄자들의 전자발찌를 감시하는 직업인이 나온 적이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과 업무의 특성, 에피소드 등을 소개했고 애로점도 밝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시청자들에게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당하기 직전에 누가 들이닥쳐서 구해주고 이런 일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고, 미리 예방하는 일이나 이미 벌어진 사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입니다.”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