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냐고? 그리스도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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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승의 러브레터] 끝까지 사랑하기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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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 가사 중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별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별을 포함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사랑은 가장 큰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습니다. 사탄도 사랑은 무너뜨릴 수 없는 이유 말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사탄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무너뜨릴 수 없듯, 하나님을 설명하는 가치인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의 가치는 ‘분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2. 그런데 하나님 사랑은 사람 사랑과 이어집니다.

내가 믿음의 사랑인가는 사랑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인가는 사람에게 대하는 언행을 보면 입증됩니다.

나의 편의를 위한 언어로 전달된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내 편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관계도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편의로 뭉쳐진 관계는 언젠가 분열이 됩니다.

3. 때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불편합니다.

왜 순종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 10:13)”.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예배드림도 기도도 실제로 하나님의 행복과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조항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하나로 요약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해지는 공식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이웃 사랑, 그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가 물었을 때,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처럼 살라’ 하심으로 사랑할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에 담기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고, 내가 무언가를 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이 보기에도 사랑스럽고, 그 누가봐도 사랑스러워지는가, 그 사람이 사랑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행복한 사랑이 되기 위한 해답은 간단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내가 만족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기 시작하면 잠깐의 기쁨으로 끝이고, 행복은 없습니다.

5.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 ‘ 나는 사랑스러워지고 있을까?’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행복을 결정하니까요.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습니까? 여러분에게 바른 소리를 딱딱 하는 사람이던가요? 옳고 그름을 잘 가리는 사람이던가요? 유식하고 대단하다 할지는 모르지만, 사랑스러움과는 왠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사랑의 가치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타인을 통해 느낀 사랑의 감정을 통해 이제 스스로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에 있어 전문가가 되어가고, 지식량이 많아지고, 성실하기로는 1등일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일도 나름 많이 하고 유명세를 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미워지는 마음은 없으십니까? 점점 고독해지고 외로워지면서 ‘그래도 난 괜찮아, 일 잘하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남을 볼 때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사탄은 사랑을 무너뜨릴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꿉니다. 사랑을 구현하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그래서 외롭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오늘 사랑의 편지에서는 바른 사랑을 다시 한번 재점검해 보십시다.

6. 첫째로 사랑은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은 그 방향을 나 중심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똑같은 ㄴ 자음에 모음 방향만 바꾸면, 나는 너가 됩니다. 나에서 너로 가야 하는 사랑이, 너에서 나로 바뀝니다. 너에서 나인 사람은 언제나 누구를 만나도 결국 중심이 자기입니다.

위에서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럴 때 관계의 중심은 ‘내’가 됩니다. 사역을 하는 데서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섬김의 자리에 있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있어서 나의 편의 나의 만족과 편의를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남은 미워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을 부족하게 여기니, 그 사람을 볼 때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리 만무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바로 나에서 너로 가야 합니다. 아무리 판단해도 부족하고 틀렸다 여겨지는 그 ‘너’가 보기에 내가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7, 둘째, 사랑은 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닌 마음으로 수용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가장 크다 했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자녀가 부모 마음 이해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설령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그 부분은 내 수준에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내 수준을 벗어난 부분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도 내가 이해하기엔 하나님 만큼이나 큰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는 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니라, 수용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수용은 곧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 하면서도 헤어질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생각이 너무 달라요.”

그런데 맞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란 원래 당연한 겁니다. 생각이나 성격이 차이 나서 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내 수준에 맞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니 불편해지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아무리 가까워도 서로 밀쳐내기 시작합니다.

자석도 같아지면 서로 밀쳐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의 모습을 내 수준으로 끌어오려고 통제하면 마찰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랑은 수용입니다. Accept,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격이 있어 선택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믿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겨자씨 만한 믿음을 산처럼 여겨 주셨습니다.

믿음의 시초,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신뢰 관계는 알지 못해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믿음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8. 셋째,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한번도 지각했다고 뭐라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지각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각하거나 빠진 사람들을 믿어주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모든 목사들이 안수받을 때 성찬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놓치고 사역할 때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성찬식 제정을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설명해 줍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이 모일때마다 성찬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먹을 때나 마실때나 모일 때나 그리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계급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일을 하느라 늦게 오거나 누군가는 몸이 아파 늦게 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제 시각에 맞춰 왔습니다. 얼마나 성실하다 여겨지겠습니까?

문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왔다고 먼저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라(고린도전서 11:22).”

그리고 나서 성찬을 제정하고,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이것이 성찬의 정신입니다.

내가 먼저 왔을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사모하고, 먹지도 않고 와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늦게 오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깨닫고 나서 모든 예배, 그리고 모임에 적용하려 애를 썼습니다. 본 예배를 제외한 모든 모임들 수련회에 늦게 퇴근하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 예배 시간을 늦추었습니다. 예배의 시작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기다려줄 수 있는 마음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이용할까요. 조급하게 만듭니다. 아니 조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확하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어긋난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렇게 사탄이 시험합니다. 어떻게요?

“나는 성실하고 나는 올바른 사람이야”라고, 어느덧 중심에 ‘내’가 서게 만듭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다리십시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9. 넷째,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상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가까워질수록 무례해진다는 것을 잘 모르는 탓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무례해졌습니다. 가족일수록, 친구일수록 무례해집니다.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합니다. 거르지 않습니다.

가끔 청년부 단톡방에서 대화를 보면 아찔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가깝다 여겨지는 사람들끼리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는 대다수의 거리가 먼 사람들은 보면서 가슴이 뛸겁니다.

여러분, 가까운 곳에서의 말과 행동에 사랑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멀리 있는 사람이 볼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려서부터 가까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서로 오가는 말들이나 표현이 거칠거나 자신의 감정일 때가 가장 조심스러울 때입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그 대화에 끼어들기도 힘들고, 상처를 받을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은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요? 남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가 내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방향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대상이 누구에게든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대상보다 내가 나이가 많거나, 직분이 있으면 무례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로 가르치지만, 그 순간 무례해질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최선을 다해 발을 씻겨주셨던 것처럼, 그리고 최후의 만찬까지 준비하시고 그 대상에 베드로와 유다까지 있었던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서 난 못하겠어가 아니라, 내가 중요합니다. 사람에 따라 예의를 지키는 정도가 똑같아야 합니다.

10.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별하는 순간 너머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아무리 99%를 잘해도, 마지막 1%의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흐려집니다. 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는 서로에게 예의도 잘 지키고, 사랑을 굳이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은 처음에는 다 줄 것처럼 마음 먹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가 되면, 뒤도 안돌아보고 갑니다. 아예 정을 떼려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한 번 점검해 보시지요.

교회를 잘 다니다가 마음에 안 드는 일들이 있으면 단톡방부터 탈퇴합니다. 아니 마음에 안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이야기들이 없으면 탈퇴하기도 합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잊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 모습으로 여러분의 모습은 기억됩니다. 어쩌면 “난 상관없어”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상관없다 말하는 여러분 마음은 공허해서 또 다른 의지할 곳을 찾을 겁니다.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한 분들도 대부분 혼인이나 장례가 있으면 그 중요한 일정은 마치고 떠납니다. 당연히 서로 위로와 축복을 주고 받기 위해서겠지만, 그때까지 잘 섬기다 끝나자마자 사라지면 사람들은 그 모습만 기억하게 됩니다. “자기 계획이 있었던 거구나. 결국 다 떠나네”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내 계획이나 행동이 주가 되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11. 어떻게 끝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이별의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별해야 한다면 왜 헤어져야 하는지, 그 헤어짐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는 점검해야 합니다. 헤어짐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신 것은 아침 일찍 조반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이들, 텅 빈 그물을 안타까워하시며 고기를 잡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얘들아, 아침밥 먹자” 말씀하십니다.

꿈을 잃고 헛그물질을 하는 베드로에게 사랑을 물으시고는, 사랑을 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꿈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바로 베드로에게 심어주신 꿈입니다.

믿음과 사랑 사이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 꿈은 그런 허물 많은 베드로를 믿고 맡겨주시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내 양’, 즉 예수님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12. 여러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사랑도 큽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큽니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사랑이 안 되는 분이 있습니까? 그 분이 그렇게 큰 사람이라 그런 것입니다. 인정하십시오.

나는 큰 존재를 사랑하기에 턱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큰 존재가 보기에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보다 똑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보다 옳고 그름을 판단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판단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끝까지요. 끝까지….

그러면 사랑스러워집니다. 사랑스러워지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꿈을 서로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14. 사랑은 돌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확장시키기 위해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명문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최선 다해 사랑한 것은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흘려 보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자꾸 나도 사랑해달라 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내 섬김과 사랑은 반드시 흘러갑니다. 그것을 위해 살면, ‘내가 사랑스러워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15. 2022년 올해 생명샘교회는 계속 파송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함생명 허단비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처음에는 재정 걱정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재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 마음 되느냐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일반 재정, 선교부, 그리고 모든 부서가 십시일반했습니다. 너의 꿈이 나의 꿈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지만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나 청년이 된. 아동부 선생님이면서 찬양인도자가 결혼하고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 입장에서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그로 인해 어린이 교사나 찬양인도자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워진 자리는, 우리 마음을 비울 때 주님이 언젠가 채워주십니다.

미군으로 근무하면서 늘 자리를 지켜주었던 쌍둥이 청년들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못본 기간이 길고, 직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파송예배를 드렸습니다. 똑같이 축복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졌습니다.

누군가가 앞으로는 떠난다 하면 파송예배를 드릴 생각입니다.

간혹 묻습니다. 어차피 못볼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파송예배까지 드리면서 하는지요. 선교사나 목회자 직분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파송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해답은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조금만 다르면 등돌리는 세상에서, 헤어지는 자도 최선을 다해 이별을 이야기하고 축복할 수 있는 공동체 되기 위함입니다.

그때 우리는 헤어짐의 순간조차 사랑하게 되고, 누구에게나 모든 순간 예의를 갖춰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을 받은 이들이 그래서 다시 돌려주려 하지 않고 본인이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믿음입니다. 사랑을 돌려받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사랑은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별까지도 사랑하십시오. 이별도 사랑에 포함되는 일부분임을 잊지 마십시다.

이별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에야,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아니 자연스럽게 사랑스러운 사람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굴 것입니다.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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